2012.09.14 20:25
좋은 소식과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와 전하는 자
(이사야 52장 7-8절)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들을찌어다 너의 파숫군들의 소리로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일제히 노래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실 때에 그들의 눈이 마주 봄이로다”
오늘 우리가 설교를 들을 때에 주의해서 집중력을 갖고 듣지 않으면 그 말씀이 지나가 버립니다. 여러분이 이 말씀을 들을 때에 마음에 꼭 새겨지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좋은 소식을 공포한다”고 말씀을 하시고, 그다음에 또 “복된 좋은 소식을 공포하며 여호와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시게 된다”고 외쳤다고 했습니다. 구약 시대는 “여호와가 온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성부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약 시대에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시온으로 돌아오시는 그 하나님을 맞이할 수 있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기 좋은 소식과 복된 좋은 소식을 어느 시대에 분명히 전하기는 해야 되는데, 어느 시대에 누가 어떻게 전하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내용을 분석해서 나누어보면 분명히 신약 시대의 은혜의 해와 신원의 날의 역사로 나눠지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은 율법 시대에서 은혜 시대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은혜 시대에 관한 내용을 계속 말했습니다. 로마서3장에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라고 말하면서 율법시대와 은혜시대를 나눴습니다. 그럼 오늘 이시대의 우리는 이사야 61장 1절과 2절에 근거해서‘은혜 시대의 말씀과 신원의 날의 말씀으로 나눠서 말하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이 시대에 여러분의 입술을 하나님이 빌려 쓰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엊그제 지하철에서 신천지 사람을 만났는데 자기가 나팔 불러 왔다고 하기에 지금 몇째 나팔 불고 있느냐고 그러니까 대답을 못해요. 여러분은 그런 헛소리를 내는 나팔이 아니라 정확하게 부는 나팔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여러분, 그러면 우리는 이 역사를 또 알아야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이라고 하는 할례 받지 못한 강대국에 포로로 잡혀가서 짐승들보다 못한 취급을 받아가며 멸시와 천대 속에서 각종 억압을 받는 노예 생활을 하다가 해방 받아서 자유의 몸이 되어 고국으로 돌아간다는 이 소식이 그들에게 들려졌을 때에 그보다 더 큰 기쁜 소식이 없었을 겁니다. 정말로 죽을 고생을 하고 억압을 받고 짓눌리며 사람대접 못 받다가 하나님께서 그 짓밟혔던 포로 생활에서 해방받아 고향 가게 된다고 하는 소식을 들었다면 그 소리를 듣던 사람들은 그 자리서 방방 뛰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이사야 선지자는 나누어놓지도 않고 두 번이나 ‘좋은 소식, 복된 소식을 공포한다’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을 나눠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7절 상반 절에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게 된다”고 했는데 그들에게 좋은 소식이란 무엇입니까? 먼저 이 좋은 소식은 평화가 깃들게 되는 좋은 소식을 알리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 소식을 들을 자가 있겠지요? 오늘 우리가 죄악 세상에서 죽음의 쇠사슬에 묶여 신음하고 사탄의 억압 속에 고통을 받다가 예수 십자가 피로 죄 사함 받고, 지옥 갈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서 천국 가게 된다고 하는 소리를 들었을 때에 얼마나 기쁘고 즐거우며 이같은 기쁨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것같이 소망적인 말씀이 없을 겁니다. 그래서 옛날에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죄악 벗은 우리 영혼은 기뻐 뛰며 주를 보겠네’라며 감사 찬양을 했습니다. 죄악 벗은 영혼이 주님의 십자가 피의 공로를 입고 그 모든 죄의 짐을 벗어던지고 기뻐 뛰며 노래하면서 죽음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그 진리의 길을 달려갔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내 마음에 평안이 오고 기쁨이 왔던 것입니다. 이것이 첫째로 좋은 소식을 가져올 때 평화가 공포되는 역사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10장 14절에서 15절에 이 말씀을 인용을 합니다. 인용을 할 때 이사야 52장 7절 상반 절만 인용해서 말씀했는데 ‘믿지 아니하는 자를 어찌 부를 수가 있으며 전파해주는 자가 없이 어떻게 들을 수가 있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 하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기록된바’라며 말씀을 인용하시는데 어디에 기록된 바냐면 오늘 이사야 52장 7절에 기록된 말씀을 인용합니다.“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라고 하면서 그 뒷부분은 뺐습니다. 여러분, 동인교회 오시는 이유가 뭡니까? 그냥 앉아서 지그시 눈 감고 있다가 그냥 예배 끝나면 종종 걸음으로 집에 가려고 옵니까? 그리고 결혼식장이나 바깥의 유원지를 갑니까? 오늘 여러분은 이 예배가 나의 영생과 관계되는 예배라는 것을 아셔야 하고 말씀이 내 영혼의 양식이 돼야 됩니다.
여러분, 준비를 하고, 또 한다고 해도 잊어버리는 것이 있고 아쉬운 것이 있는데, 오시는 주님 앞에 준비 없이 맞이한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소리입니다. 제가 여행 갈 때에도 며칠 전부터 준비합니다. 내가 못하는 것은 집사람보고 준비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딱 비행기를 타고 나서 확인해보면 ‘아이고 그거 빠졌네’라고 하게 되지 완벽하게 준비한 적이 별로 없습니다. 그리고 비행기서 내려서 숙소에 묶으면서 ‘아이고 그거 안 가져 왔네’라고 많이 하죠. 그러나 이것은 양념입니다, 그것은 준비를 미처 못 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오시는 주님은 준비 없이 맞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기독교인들이 주님 오심을 기다리는 것은 바보 멍청이들만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좀 모자란 자들이 그저 허무맹랑한 소리를 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이제는 모든 면에서 주님 오실 때가 꽉 차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의 발이여”라고 하고 그 뒤 구절을 빼버렸는데 말하기가 싫어서일까요? 아닙니다. 시대를 알게 될 때 그 이유를 알게 됩니다.
오늘 여러분, 시대적으로 살아가는 종들은 그 시대를 알아야 되고, 그 시대에 나타나는 진리를 잡아야 되요. 오늘 내가 대통령 앞에 선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래도 화장을 하고 옷도 깨끗하게 해서 입고 가는데, 만왕의 왕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2000년 만에 다시 재림하시는데, 여러분이 대충해가지고 주님 맞이한다는 것은 너무 어리석은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까지는 이 땅위에 태어난 자는 언제 죽어도 다 죽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시대에 그 죽음의 골짜기에서 뽑아서 영과 육이 영생하도록 한다는 말씀이 있고, 그 축복을 받으려고 하는데 뭐가 좀 다르게 준비해도 해야 될 것 아닙니까? 여러분, 이것이 오늘 기독교 역사의 마지막 코스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의 말씀을 이루기 위하여 예수가 온 겁니다. 예수가 와서 우리를 위해 죽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 61장 1절에 이런 말씀이 있지요? “주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럼 목적이 아름다운 소식입니다. 바울이 인용했던 아름다운 소식이에요. 이것을 전하기 위해서 주님이 기름부음을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이 기름 부음을 받으신 주님은 그 복음의 사역을 제자들에게 맡기기 위해서 사도들을 뽑아서 열심히 훈련시켰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 땅에 1차적으로 오셨을 때는 영광도 아름다움도 기쁨도 누리지를 못했습니다. 오직 죄인을 위하여 죽으러 왔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간다고 한다면서 그 만분의 일이라도 그 분을 한 번 생각해 봐야 됩니다. 주님은 자기가 어떻게 죽을 것을 아시고 오셔서 생애를 마치셨습니다. 누가복음 19장 3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많은 백성이 예수님을 환영하면서,“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서는 영광이로다”라고 하면서 열렬히 환영했는데 그가 예루살렘에 가서 죽었습니다. 그 이유는 사도들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파하는 일을 맡기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잘 들어 주셔야 됩니다. 주님이 죽으시지 아니하시면 아름다운 소식이 전파가 안 됩니다. 평화가 그들 마음속에 깃들이지 못하기에 예수는 죽어야 됐고,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그가 살아나셔서 부활하신 다음에 예수님 대신에 성령을 보내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마가다락방의 오순절 역사입니다. 이것이 1차적인 역사입니다. 그 좋은 소식을 가져와서 아름다운 평화를 선전하고 공포하는 역사가 1차적인 역사였습니다.
그 뒤에 또 보십시요. 우리가 성경을 나눠 읽으면 은혜가 되고, 시대를 나누면 더 확신이 옵니다. 오늘 여러분, 이 시대에 교회가 많습니다. 주의 종들도 많습니다. 오늘도 주일날 설교가 전국 방방곡곡에서 메아리 치고 있습니다. 특히 이 자리에 앉아 계신 여러분, 또 이 방송을 듣고 계신 여러분은 시대를 보셔야 됩니다. 어린 아이는 철이 없을 때‘아이고 아침이 됐다, 점심때가 됐다, 저녁때가 됐다, 잘 때가 됐다’는 걸 모릅니다. 그냥 배만 고프면 달라합니다. 거기엔 시간도 없습니다. 배고프면 달라하고, 잠 오면 밤도 필요 없습니다. 잠이 오면 자 버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 때나 달라고 하고 먹고 사는 게 아닙니다. 밥 먹을 때가 있고, 일할 때가 있고, 잠 잘 때가 있다는 것을 압니다. 이것은 자라난 자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자라날 대로 자라났습니다. 이젠 말씀을 가지고 다듬어야 됩니다. 오실 주님의 때를 알아야 되요. 그러나 까짓것 내가 죽어버릴 것 같으면 상관없어요. 뭐 구원 받으면 되고 낙원에 가면 됩니다. ‘모든 기독교인이 지금까지 다 죽었는데 나라고 안 죽을 수 있나? 내가 죽으면 뭐 훗날 부활하면 되겠지’라면서 평안하게 믿는 사람은 오늘 예배 끝나고 극장가서 또 영화 봐도 괜찮아요. 지옥 안 갑니다. 오늘 결혼식에 쫒아가도 또 지옥 안 갑니다. 놀이터 가고, 관광지 가고 해도 지옥에 안 갑니다. 단지 그 길은 넓은 길이라는 것 뿐입니다. 그래도 그가 어떻게 죽었든지 간에 마지막 부활의 영광은 봅니다. 그러나 성경의 핵심은 죽은 자의 부활도 귀하지만 주님 오실 때까지 살아 있는 자의 몸의 구속의 영광이 최고의 축복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알고는 우리가 그 축복을 놓치지 못합니다. 이것 알고 어떻게 놓치겠습니까? 모르면 그냥 지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있다고 하는 걸 정확하게 알고 나면 내가 안 붙들 수 있습니까? 오늘 이 시간에 내가 눈 감고 다른 생각할 수가 있습니까? 나는 오직 그 분의 지체요, 그 분을 만날 사람이 아닙니까?
그래서 7절 하반절에 사도바울이 거론하지 아니한 구절인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는 역사”가 2차로 있고, 그 다음에 재림의 주님을 맞이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소리를 전하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이 말씀을 말하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여러분, 내가 좀 몸이 안 좋아서, 내가 오늘 분위기가 좀 안 좋아서, 내가 오늘 좀 나쁜 소리를 들어서 이 자리에 온 분이 있습니까? 설교 시간에 다 바람에 구름 가듯이 날라 버려야 해요. 말씀만이 여러분 속에 가득 채우기를 바랍니다. 왜 사도바울이 뒷 구절을 남겨놨을까요? 이사야 49장에도 보면 사도바울이 은혜의 때와 환난의 때를 나눠놓았고, 예수님도 이사야 61장을 은혜의 해와 신원의 날로 나누면서 자기의 사명 구절에만 손을 대고 나머지는 손을 대지 안했습니다. 왜 그렇까요? 아직 때가 안 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때가 왔습니다. 저는 아무리 봐도 이제는 더 나갈 곳이 없는 것 같습니다. 지금 사람의 머리가 얼마나 발달했는지 모릅니다. 사람의 머리가 고도로 발달하다 보니까 남을 생각하지 않아요. 내가 잘 살면 그만이에요. 내가 좋으면 제일이에요. 그리고 누가 무슨 소리를 해도 내가 돈만 잘 벌면 되요. 강남스타일로 나가든 강북스타일로 나가든 돈만 움켜지면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것이 아니에요. 진리의 스타일로 가서 내가 영생의 길로 가야 합니다.
오늘은 여러분, 내 마음에 서러웠던 일, 괴로웠던 일, 아팠던 일, 모든 것을 바람과 함께 멀리 멀리 날려 보내고 말씀만이 내 속에 가득 차길 바랍니다. 2차로 복된 구원의 소식은 이방 백성에게 전하는 것이 아니라 시온을 향하여 외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사야 59장 20절에 보면 “구속자가 시온에 임한다” 그랬죠? 여기“시온을 향하여 여호와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라고 했는데 주님이 이 땅 위에 다시 오셔서 나와 함께 살겠다고 하시고, 나와 함께 이 세상에서 통치하신다고 하셨다면 이 약속의 말씀 외에 더 기쁜 소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무슨 기쁜 소식이 더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복 된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가 산을 넘는다고 그랬습니다. 평지가 아니고 이 산을 넘는 자의 발걸음이 심히 아름답도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아름다운 발걸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취직한 것도, 내가 장가간 것도, 시집간 것도 다 좋은 발걸음입니다. 그러나 내가 아름다운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주님이 다시 오시니 준비하여 맞이하자고 하는 산을 넘는 발이 최고의 축복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산을 넘는 자의 발걸음은 신원의 날의, 환난 날의 종인 줄 압니다. 그래서 이사야 40장 9절에 보면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소리를 높여 지르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시내 산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절대 그 산을 잊을 수가 없을 겁니다. 우리 주님은 감람산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 여러분, 내가 이 땅 위에 살아가는데 최고의 고난의 산, 최고의 시련의 산. 눈물을 바가지 바가지 쏟으며 깜깜한 밤을 하얗게 새운 그런 날들이 있었습니까? 이것이 험한 산을 넘어가는 걸음입니다. 그러나 그 길을 가다가 주님을 맞이한다고 하면 최고의 행복인 줄 압니다. 여러분, 그 날이 오기를 학수고대하고 계시지요? 나훔서 1장 15절에 보면 “볼 찌어다. 아름다운 소식을 보하고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이 산 위에 있도다. 유다야 네 절기를 지키고 네 서원을 갚을찌어다”라고 했습니다. 원수를 갚으라 이 말입니다. 그러면서 “악인이 진멸되었으니 그가 다시는 네 가운데로 통행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여기 보니까 “유다야 네 절기를 지켜라”고 했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환란 날에 안식일도 지키지 못하고, 삼대 절기도 지키지 못했으나 이제는 이 아름다운 소식을 전파한 후에는 원수가 싹 없어지고 하기에 이제는 네가 마음 놓고 절기를 지키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하나님께서 그런 여러분의 발걸음을 친히 아름답게 보실 줄로 믿습니다. 어떤 분은 저 경기도 안성에서나 인천이나 저 38선 쪽에서 오늘 이 자리에 찾아오셨는데 그 발걸음이 아름다울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여기 파수꾼이 나오는데 파수꾼은 낮보다 밤이 더 신경 쓰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파수꾼은 자기 앞에서부터 멀리 바라보고 해가 밝기까지 또 살펴야 되고, 멀리 지평선까지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됩니다. 그래야 파수꾼이 멀리 바라보면서 자세하게 살펴야 되고, 그 파수꾼은 귀가 정말로 예민하여 소리도 잘 들어야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라에서는 파수꾼의 발걸음만 봐도 ‘아하, 오늘 큰 사고가 날 것 같구나, 아이고 저 파수꾼의 발걸음을 보니까 오늘 좋은 일이 생기겠구나’ 라고 하면서 소리를 듣지 않고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듯이 오늘 여러분, 그 산을 넘는 발걸음이 다 아름답다고 했으니 여러분의 발걸음이 정말로 아름다운 발걸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자, 그러면 이 파수꾼들이 산을 넘다가 일제히 함성을 지릅니다. 이유는 뭘까요? 여러분, 이 파수꾼이 산을 넘으면서‘야호’하고 소리 지른 것이 아닙니다. 이 파수꾼들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는데 무엇을 봤단 말입니까? 시온으로 돌아오는 주님의 모습을 본겁니다.
오늘 여러분, 기독교의 소망이 이것 아닙니까? 저의 소망과 여러분의 소망이 이것 아닙니까? 아멘하십시요. 이것이 기독교의 마지막 최고의 영광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만나러 나갔다가 못 만나고 허탕치고 돌아온 일이 생기면 얼마나 허전한지 모릅니다. 약속장소에 가서 기다렸다가 만나지 못하고 돌아올 때에 그 마음이 얼마나 상처가 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 이 파수꾼들은 성경 본문에 보면 “그 파수꾼들의 소리와 그 발걸음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라고 했는데 여기 파수꾼들이라고 했기에 한 사람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 파수꾼들이 일제히 소리를 내요. 한 목소리를 냅니다. 이것이 뭐냐면 우리는 절대로 한 목소리를 내야 된다는 겁니다. 참 우리 민족은 정치하는 사람들이 한 목소리를 못내요. 지금 일본사람이 엉뚱하게 대한민국 영토인 독도를 자기 땅이라고 할 때, 싸우다가도 그 정치인들은 똘똘 뭉쳐서 독도는 자기들 땅이라고 그래요. 대한민국은 야당 사람들이 작년에 이 나라 대통령은 왜 독도에 한번도 못 갔다 오느냐? 배짱도 없냐? 그러더니, 갔다 오니까 왜 갔다 왔냐고 또 따져요.
여러분, 물고 늘어지는 귀신이 붙어 놓으면 가만히 있지를 못합니다. 그 사람들이 한 말을 적어보십시오. 작년에 한 말, 올해 한 말을 보면 얼마나 물고 늘어졌는지 모릅니다. 이래도 물고 늘어지고 저래도 물고 늘어져요. 저렇게 일본 국민들이 한 목소리로 자기 땅이라고 하는데, 대한민국 국민은 정치인들이 그걸 가지고 옥신각신하며 제 각각입니다. 북한 김정은이 저 패거리도 독도는 한국 땅이라고 하고 있는데, 대한민국의 국민, 정치인들이 왜 이러는지 이건 뒷동산의 새소리도 아니고 무슨 이런 짓들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싸울 때는 싸워도 국민들이나 정치인들이 나라의 중요한 일에는 좀 합쳐 줘야죠.
그런데 오늘 여기에 보니까, 일제히 파수꾼들이 한 목소리로 외치고 있는데, 기독교 역사만이 이런 소리가 나고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이런 역사에 동참이 되고 있지 않습니까? 자, 일제히 노래한다고 했는데 그 목소리가‘죄악 벗은 우리 영혼은 기뻐 뛰며 주를 보겠네’라고 하는 소리와는 다릅니다. 여기 “여호와께서 찾아오신다”고 했는데 누굴 찾아오시는 겁니까? 파수꾼을 찾아오십니다.“여호와께서 이들을 찾아오실 때에 그들의 눈이 마주 봄이라”고 했습니다. 중국어 성경은 여기‘직접 볼 것이라’면서 더 강력하게 표현 해놨어요. 직접 보는 게 마주보는 것인데 더 강한 표현으로‘내가 마주 쳐다 봤다’라는 소리입니다. 그리고 본문에“여호와께서 오신다”고 했는데 왜 여호와라고 했냐면 구약 때이기 때문이라고 했죠? 이사야 19장 보면 “여호와께서 빠른 구름을 타고 오신다”고 그랬는데 구약은 성부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신약시대에 와서 주님께서 “내가 구름을 타고 오리라”고 여러번 말씀 하셨습니다.
오늘 여러분, 우리는 이 오실 주님을 눈으로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볼 수 있는 육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기 때문에 초림의 주님이 이 땅에 오신다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그냥 지나가는 소리가 아니라 내 앞에 현실적으로 이루어질 말씀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초림의 주님이 이 땅 위에 오셨을 때에 낮은 마구간에서 태어 나셨는데 그 때에 세상이 얼마나 어두웠는지 모릅니다. 말라기 선지자 이 후 400년 동안은 암흑시대였습니다. 그 때에 종교 지도자들이 없었습니까? 있었습니다. 그때에 교회가 없었습니까? 있었어요. 그때에 하나님의 백성들도 또한 있었습니다. 그런데 암흑시대였습니다. 지금 교회가 어두워지는 것 보십시오. 주일 날 성경과 찬송가를 가져갈 때는 교인 같은데, 갖다 와서는 성도들 같은지 보십시오. 그리고 설교를 들어보세요. 영혼의 양식이 되고 있는가? 윤리와 도덕은 초등학교 교과서가 더 잘 돼있습니다.
이사야 60장에 보면 주님이 다시 오실 때에“어두움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릴 것”이라고 이미 성경은 말해놨습니다. 그때에 구원의 빛을 쫙 발할 때에 열방의 모든 백성들이, 원방의 모든 나라들이 이 빛을 보고 돌아올 것이라고 성경은 예언이 돼있습니다. 여러분, 양식이 없을 때에 양식이 꽉 들어 있는 가마니가 있다면 안 먹어도 배부르다고 합니다. 오늘 날 우리가 빛을 가질 때에 어두움도 두렵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6.25 전쟁 나고 가난하고 헐벗고 할 때에 나는 쌀가게를 한다고 그랬어요. 어떻게 그때에 먹기가 어렵고 그렇게 입을 옷이 없었던지 몰라요. 우리학교 선생님이 붓글씨를 하도 연습하라고 해서 제가 붓글씨를 좀 씁니다.
오늘 여러분, 지금도 초등학교 선생들이 좌경사상을 아이들에게 가르치면 그것이 잘 안 빠져 나갑니다. 주일학교에서도 잘못 가르치면 그것 또한 안 빠져 나갑니다. 제가 초등학교 때 우리 애들이 옷이 다 없어요. 그저 떨어진 옷을 입고 할 때에 “옷 없다 한탄 말고 목화 정산 힘쓰자”라고 붓글씨로 그걸 썼어요. 제가 등수는 못 들어갔어도 칭찬은 받았어요. 그 때 옷 재료가 뭐냐면 목화였습니다. 그러다가 구호물자가 오면요, 얼마나 큰 바지가 있는지 사람이 둘 들어가도 될 정도인데 둘둘 묶으면 아주 따뜻합니다. 구두가 한 켤레씩 오면요 하도 커서 큰 배 같지만 그래도 묶어서 신고 다녔습니다. 여자들의 브레이저를 처음 보니까 그것으로 귀마개를 하고 다녔으니 얼마나 우스웠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지금은 웃지만 그 당시는 정말로 영하 17도나 18도 강추위에 귀가 얼어서 터질 것 같은 때였기에 수건대신 그런 것으로 귀마개를 하고 다니는 때가 있었습니다. 요사이 아이들은 그런 걸 잘 모릅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세상이 어두워지고 시대가 혼란하고 아주 컴컴해 질 때, 우리는 정말로 성경 본문대로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와서 “영과 육의 구원이 이루어진다”라는 소리를 지르며 산을 넘을 때, 그 산을 넘는 피곤한 발걸음을 찾아 주님이 오신다고 했는데, 그 주님과 눈이 마주칠 때에 어떻겠습니까? 그래서 이사야 25장 8절에 보면 주님께서“눈물을 닦아 줄 것이다”라고 그랬습니다. 요한계시록 7징17절도“그들의 눈물을 닦아 줄 것이라”고 했고, 요한계시록 21장 4절에도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어 주신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눈물은 너무 반가워서도 나고 너무 괴로워도 눈물이 납니다. 이 처럼 모든 회포가 풀어지는 그 날이 옵니다. 여러분, 주님이 약속하신 이 날까지 못 울고 의지할 곳 없고 기댈 곳이 없어서 못 울었던 분들, 이제 주님의 품안에서 실컷 우시는 날에 주님은 분명히 여러분의 눈물을 닦아주실 것입니다.
이처럼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와서 전파하는 그런 발걸음을 주님은 기뻐보시고 그들을 찾아 다시 오신다고 약속해 놨으니 “세상만사 살피니 참 헛되구나 부귀영화 공명은 다 날아가고 없어도 오직 내 마음속에는 날 찾아오시는 그 주님을 모시고 영원히 살아가리라”고 하는 마음을 가지시고 주신 사명 잘 감당하시다가 그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