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2.23 22:22
제사와 봉사에 인정받은 자
(히브리서 11장 4절 ~ 6절)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
히브리 11장을 우리가 항상 믿음 장이라고 말을 합니다. 11장에 나타난 이름들을 보면 한 20여명이 거론되고 있습니다. 이름이 거론 안 된 분도 기록되어 있지만 이 20여명의 신앙의 선진들중에 믿음으로 승리한 분들이 나오기에 히브리서 11장을 믿음 장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본문 내용에는 아벨과 에녹에 대해서 나옵니다. 아벨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다가 인정을 받았으며 에녹은 하나님 앞에 충성과 봉사를 하다가 인정을 받았습니다. 오늘 이 두 분의 제사와 충성과 봉사를 우리가 함께 본받아야 될 줄로 압니다.
아벨이라고 하는 이름은 ‘생기’라고 하는 뜻이 있고, 에녹이라고 하는 이름은 ‘바친 자’, 또는 ‘시작하는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어쨌든 간에 제사에 성공한 자가 아벨이라면 하나님 앞에 충성과 봉사로 인정을 받은 자는 에녹입니다. 그리고 그 뒤에 노아와 아브라함이 나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절대 믿음으로 순종하여 방주를 지었는데, 그는 한번도 물로 인류를 심판하는 일을 목격하지도 않았는데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즉시 순종하므로 전 인류가 심판당하는 날에 그와 온 가족을 다 구원 시켰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역시 믿음으로 순종하다가 믿음의 조상이라는 칭호를 받았습니다.
오늘 여러분, 히브리서 11장에는 아벨로부터 쭉 이름들이 거론되어 나오는데, 이 분들이 살아가는 시대는 서로가 다릅니다만 이분들의 공통점이 뭐냐면 모두가 믿음으로 살았고, 믿음으로 이겼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벨로부터 시작하여 사사시대와 열왕시대를 거쳐서 사도시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시대가 흘러갔는데 하나님은 그들의 역사를 한 시대로 보고 있습니다. 과거, 미래 할 것 없이 하나님은 동일한 시대로 보고 평가를 하십니다. 왜 그럽니까? 몸을 가지고 있지 않은 하나님의 신은 항상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다 가지고 계십니다. 인간의 생각과 인간의 시간을 초월하고 계시는 분이 하나님 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동일선상에 이들을 얹어놓고 다 같이 믿음으로 승리한 것으로 평가를 하셨습니다.
오늘 먼저 아벨의 제사를 우리가 한 번 생각해 봐야 됩니다. 여러분도 제사에 성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제사에 성공하는 사람은 마지막에 성공하는 자가 됩니다. 제사에 실패하면 마지막 역사에 실패한 자로 패자가 됩니다. 오늘 여기 4절에 보면 아벨의 제사를 하나님이 인정을 합니다. 이 아벨에 대해서 말씀하면서 창세기 4장 3절과 4절의 구절들을 인용을 하고 있는데,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라고 하는 단서가 붙어있습니다.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의로운 자라고 인정을 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도 ‘의로운 자’라고 하는 인정을 받기를 바랍니다. 노아가 의로운 자라고 인정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정을 하시면 인정 되는대로 복이 될 줄로 압니다. 그래서 먼저 아벨이 ‘의로운 자’라고 인정을 받았고, 또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 앞에 기쁘시게 한 것이 뭐냐면 첫째로 아벨은 짐승의 첫 새끼를 하나님 앞에 드렸다고 했습니다.
오늘 여러분, 이 말씀을 곱씹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말씀을 잘 씹어야 그 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자, 여러분 보십시오. 아벨은 양을 치는 자요 가인은 농사 짓는 자입니다. 그런데 아벨은 자기가 양을 치고 있으니까 그 양을 드리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첫 새끼를 드렸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그 당시에는 제사 제도도 없고 제사 드리는 양식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아벨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첫 새끼를 드릴 줄 알았을까요? 그 때는 양심의 법을 지키던 양심 시대였기에 제사법이 뚜렷하게 있지도 않은 시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때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첫 새끼를 드리므로 하나님께 의로운 자라고 하는 인정을 받습니다. 그럼 농사짓는 가인은 뭘 드려야 됩니까? 농사지은 것을 드리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농사지었을 때에 첫 것을 드려야 되는데, 가인은 그 첫 것을 드렸다는 말이 없습니다. 그럼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알고 드린 자가 이겼습니다. 가인은 농사를 짓기에 첫 곡식, 첫 열매를 드려야 되는데 그 첫 열매를 드렸다는 말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 제사를 거절해버렸습니다. 실패한 제사입니다.
사실 여러분, 하나님이 첫 것을 좋아하는 줄을 그 백성들이 언제 알았습니까?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광야에 나와서 율법을 받을 때부터 하나님이 첫 것을 좋아하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고대에 아담과 하와에게서 난 자식이 하나님이 첫 것을 드릴 때에 참으로 좋아하시고 기뻐하신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요? 그래서 아벨은 짐승의 첫 새끼를 드리므로 거기에서 합격이 되었지만, 가인은 곡식을 드렸기에 불합격된 것이 아니라 첫 것이 아니었기에 그렇다는 겁니다. 이것이 제사에 성공하는 비결의 첫 번째 요인입니다. 오늘 여러분, 그래서 우리가 일주일 중에 첫날을 주의 첫날로 하나님께 드리는 겁니다. 날의 첫 시간에 새벽예배를 드립니다. “짐승도 첫 것은 내 것이야. 자식도 첫 것은 내 것이야”라고 하면서 하나님이 첫 것을 좋아하시는 것을 율법 시대 이후에야 알았는데, 그 고대 문자도 없던 시대에 그 아벨이 하나님이 기뻐하는 제사는 첫 것을 드려야 하나님이 받으신다고 하는 것을 알고 드렸다고 하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영감으로 알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복 받을 자에게는 그런 은혜를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아벨이 두 번째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은 그 제물을 “믿음으로”드렸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아벨의 제사 속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믿음이 들어있었습니다. 그런데 가인이 곡식을 드리는 제사 속에는 믿음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첫 열매라는 말도 없고 믿음이라는 말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당연히 거절해버렸습니다. 실제로 제사법이 있을 때도 아닌데 하나님은 그렇게 나누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냥 거절하지 않아도 되는데 반드시 두 제사를 놓고 하나는 받아들이고 하나는 거절해버렸다고 했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믿음으로 이 자리에 온 줄 압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무엇이든지 내가 첫 것은 하나님 앞에 드려야 되겠다”라고 하면서 아벨의 기도, 아벨의 믿음, 아벨의 실천을 하므로 주님을 맞이할 때에 그것이 밑거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 보십시요. 가인이 자기가 드리는 제사를 안 받고 아우가 드리는 제사를 받았다면 그 원인을 파악해야 됩니다. “아, 도대체 내 동생은 제사를 받았는데 내 제사는 왜 받지 않을까?”하고 그 원인을 찾아서 해결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다음에는 나도 절대적으로 첫 것을 바치렵니다. 그리고 나도 믿음으로 바치렵니다”라고 해야 원칙인데, 동생 제사는 받고 자기가 드리는 제사를 안 받으니까 그만 동생을 쳐 죽여 버렸습니다. 그래서 선악과 사건 이후에 살인사건이 가정에서 일어났습니다. 이는 아버지, 어머니가 하나님의 법을 어김으로 말미암아 그 자식들에게 죽음의 첫 단추를 끼게 됩니다. 오늘 여러분, 나의 잘못으로 인해 자식들에게 저주가 내려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듣고 계시는 여러분, 아벨은 순교를 당했으나 오늘날까지 그의 예물이 증거를 하고 있다고 그랬습니다. 첫 것을 드림으로 말미암아서, 믿음으로 드림으로 말미암아서 하나님이 받았다라고 하는 증거가 오늘날까지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일서 3장 12절에 보면 “가인은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다”고 했습니다. 그 악한 자가 누구냐면 사탄입니다. 사탄은 뭡니까? 어두움입니다. 어두움에 속한 가인이 빛 쪽에 있는 아벨을 치고 들어온 것입니다. 그래서 선과 악중에 선은 빛이요 어두움은 악이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1장의 천지창조의 원리를 보면 어두움이 먼저 시작이 됩니다. 이것은 선악과를 먹기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이렇게 예정하셨고 그 예정한 프로그램대로 진행이 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 봐 보십시오. 빛에 속한 자는 선하지만 어두움에 속한 자, 즉 사탄에게 속한 자는 악합니다. 아우를 죽여 놓고도 전혀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습니다. 오늘날 이 세상도 보십시오. 사탄에 속한 자가 부모 형제를 살해하고도 전혀 양심의 가책도 받지 않는 화인 맞은 인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잔인한 범행을 저질러도 그렇게 하는 것은 사람의 본 마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얼굴에 철판을 깔고 사는 사람이지마는 사람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그 속에 사탄이 있다는 소리입니다. 오늘날 현 세상도 그렇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듣고 계신 여러분, 정말로 제사에 성공하고 있습니까? 내가 제사에 성공자가 되고 있습니까? 아니면 실패자입니까? 예배에 성공한 자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이 예배는 나와 관계되는 예배가 돼야 되고, 나와 관계되는 제사가 돼야 되며, 나와 관계가 되는 봉사가 돼야 됩니다.
이제 두 번째로 봉사와 충성에서 인정을 받은 에녹이 나옵니다. 역시 에녹도 창세가 5장 21절~24절을 인용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말씀을 들을 줄 알아야 됩니다. 그냥 말씀이 주르륵하고 흘러가 버리고, 오늘 설교가 어떻게 된 줄도 모르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여러분, 세상이 얼마나 바뀌고 있습니까? 지금 얼마나 시대가 소용돌이 치고 있습니까? 이런 시대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있다고 하는 것을 깊이 생각해 봐야 됩니다. 그냥 형식적으로 교회에 달랑 왔다가 뭐에 쫓기듯이 가는 그런 성도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늘 에녹은 봉사에 인정을 받았고, 충성에 인정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창세기 5장 21절부터 보면 이 에녹에 대해서 나옵니다. 에녹은 창세기 5장에 보면 아담,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그리고 일곱번째로 에녹 이랬습니다. 그러니까 아담의 칠대손이 되지요? 그 에녹이 삼백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을 했다고 그랬습니다. 오늘 여기서 우리가 잘 봐야 될 말씀이 있습니다. 에녹이 삼백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했는데 그의 나이가 삼백육십오 세를 향수 하였더라는 말만 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 이름 뒤에는 누가 누구를 낳고 몇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고 되어 있는데 에녹이라고 하는 이름 뒤에는 죽었다는 말이 없습니다. 에녹이란 이름 뒤에는 향수했다는 말은 붙어있는데 죽었더라는 말은 없습니다.
이 에녹에 대해서는 ‘죽었다’는 말은 없고 “그를 데려가심으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고 기록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죽는다는 표현을 다른 표현으로 ‘데려간다’라는 소리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에녹을 ‘데려갔다’는 것을 ‘죽었다’는 표현으로 보면 안 되겠지요? 오늘 본문 히브리서 11장에는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고 했는데 여기에 ‘옮기웠다’는 단어가 ‘메태대케인’이라는 단어인데 이는 몸이 ‘변화됐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변화된 몸으로 바꿔버렸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는 변화 성도라는 말입니다. 그럼 에녹이 삼백육십오세까지 살고 그 몸을 신의 모습으로 바꿔버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사건입니다.
그래서 5절에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그를 옮기심으로 그가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그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고 했는데 그 뒤에 나오는 “옮기우기 전에”라는 것은 다른 단어인데 그 뜻은 “변화되기 전에”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 에녹이 몸이 변화되기 전에 하나님을 잘 섬겼다는 겁니다. 그럼 오늘 이 말씀은 누굴 들으라고 하는 것이냐면 오늘 우리를 두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그가 옮기기 전에 하나님을 잘 섬겼는데, 잘 섬기다가 그 몸이 죽지 않고 바뀌어버렸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승천할 때도 이 단어를 썼습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날에 여러분들도 주님께로 올라갈 때에 이 단어가 쓰여질 줄로 믿습니다.
다시 말해서 에녹이 삼백년 동안 이 땅에 있으면서 그 몸이 변하기 전에 얼마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으며 얼마나 하나님을 잘 섬겼기에 그런 말을 했을까요? 그가 하나님을 잘 섬기고 봉사에 인정을 받았고, 충성에 인정받은 겁니다. 그런데 삼백육십오세까지 그가 향수를 하고 그를 변화된 몸으로 바꿔서 데려가 버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에녹의 아들 므두셀라가 이 땅위에서 최고로 오래 산 사람입니다. 그가 구백육십구세를 살았으니 거의 천 살 가까이 살았습니다. 아버지의 은혜를 입었는지 몰라도 아주 장수했습니다. 이 말이 뭐냐? 하나님이 역사를 해주시면 천년을 거뜬히 넘긴다는 소리입니다. 그래서 계시록20장 4절부터 보면 우리가 “그리스도와 더불어 우리가 천년동안 왕 노릇 하리라”고 말했습니다. 에녹이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충성했기에 변화체의 몸으로 바꿔서 데려가 버렸을까요? 유다서 14절~15절에 보면 아담의 7대손 에녹은 “경건치 아니한 자를 심판하러 주께서 심판주로 오신다”고 그 백성들에게 입을 열고 외쳤습니다. 심판주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오신다고 외쳤고, 그 심판을 늘 염두에 두고 두려워하면서 경건한 생활을 한 자가 에녹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본문에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들림을 받았다”고 했는데 이것을 그가 “죽음을 당하지 않고 들림 받았다”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왜그런지 이 문제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을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8장51절에 예수님께서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지키는 자는 결단코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고 그랬습니다. 그러면 예수님 당시의 그 사람들이 죽음을 보지 않았습니까? 죽음을 봤습니까? 죽음을 봤습니다. 오늘 여기에 히브리서 11장 5절에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리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다”라고 되어 있고, 창세기 5장 24절에는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심으로 보이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히브리서에는 에녹이 죽음을 보지 않았다고 했고 요한복음 8장 51절에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결단코 보지 아니하리라”고 했는데 이 두 문장을 연결해보십시오. 그럼 예수님 당시에 요한복음의 이 말씀이 맞았나 안 맞나 보십시오.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안 맞았습니다. 그러면 먼저 에녹이 “죽음을 보지 않고 들림 받았다”고 했는데 이는 그가 죽지 않고 올라갔지만 그냥 “안 죽었다”로만 보면 안 됩니다. 그가 “죽음을 보지 않았다”는 그 죽음은 일반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에녹이 “심판주가 오신다” 외친 뒤에 뭐가 이뤄졌냐면 노아 홍수가 와서 모든 인류가 심판의 죽음을 당해 버렸습니다. 그 전 인류가 심판 당하여 죽는 그 죽음을 에녹은 보지 않고 들림 받았다는 것입니다. 에녹이 죽음을 보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이렇게까지 봐야 됩니다.
그러면 왜 에녹이 심판의 경고 자가 되었을까를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만약에 에녹이 살았다면 노아 홍수와 맞닥트려질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충분히 있거든요. 그러면 이 사람을 살리려면 어디에 들어가야 되느냐면 역시 노아같이 방주에 들어가야 되는데 그 라인에서 빼버렸습니다. 그 이유는 노아는 환란을 준비하고 이기는 자의 대표적인 자로 넣었지만 에녹은 경고한 자의 대표자로서 미리 큰 심판이 있을 것을 경고하게 하고 그 전 인류가 죽는 죽음을 보지 않게 하고 들림 받게 했다는 겁니다. 이해됩니까? 그러니까 에녹이 보지 않은 죽음은 개인 죽음이 아닙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8장 51절에 “내 말을 듣고 지키는 자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는 것도 개인 죽음을 보지 아니한다고 하면 안 되고 마지막 때에 전 인류의 죽음으로 봐야 됩니다. 이렇게 보니까 너무나 옳더라고요. 그래서 얼마나 은혜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에녹이 개인 죽음을 보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인류 심판의 죽음을 보지 않고 들림 받았다는 겁니다. 자, 여러분 보십시오. 아벨이 그 첫 새끼를 하나님 앞에 드림으로 인정받았는데 그것을 보면 아벨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가 있었던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또한 에녹이 인류를 심판하기 위해서 “심판주가 오신다”고 외친 것도 에녹에게 뭔가 온 것이죠? 그에게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왔기에 그렇게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에녹이 하나님과 삼백년 동안 동행하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함으로 그 몸을 변화시켜 데려갔던 것입니다. 즉 변화시켜서 뭘 보지 않게 했냐면 죽음을 보지 않게 했습니다. 그 죽음이 개인 죽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자, 그러면 마지막 때에도 전 3년 반 역사를 마치면서 후 3년반 역사와 대접재앙 등이 오지만 마지막 종들은 그 전 인류의 죽음을 보지 않고 올라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에녹의 몸이 변화돼서 올라간 것과 동일합니다. 이것이 요한복음 8장에 “내 말을 지키는 자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성경이 4복음서와 계시록인데 그 말씀속에 주의 말씀을 정확하게 지키는 자는 에녹과 같이 인류 심판으로 오는 저주의 죽음을 보지 않고 올라가게 될것이라는 겁니다. 이것을 깨닫고 나니 어떻게나 감사한지요. 옛날에는 제가 미쳐 못 깨달았습니다. 여러분은 제 소리를 듣고 깨달아 지니까 제가 먼저 많이 깨달아야 여러분이 수지가 맞습니다.
그가 ‘죽음을 보지 않고’라는 것을 자세히 보면 사실 죽음을 얼마나 많이 봤는데 죽음을 보지 않고라고 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도 “죽은 가가 죽은 자를 장사 지내게 하고 너는 나를 쫒으라” 그랬는데 얼마나 죽은 자를 많이 봤는데 ‘죽은 자를 보지 않는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 이 말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내리는 영의 역사는 영생하는 역사가 내리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망이 임하는 역사가 이 땅을 덮고 있는데 아무데나 가서 예배드리고 쫒아 다니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본인들이 알아야 됩니다.
오늘 에녹이 심판의 경고를 하게 하고 전 인류가 물 심판으로 죽는 죽음을 안보고 그 직전에 올라가 버렸습니다. 여러분, 그 시대는 므두셀라가 천살 가까이 살았는데 에녹은 므두셀라 보다 오래 못 살 것 같습니까? 그 자식이 그렇게 오래 살아서 아담보다도 오래 살았는데 에녹이 그렇게 못 살 것 같습니까? 그런데 에녹을 심판주가 온다고 증거하게 하시고, 그 주님이 오신다고 외친 그 입이 귀해서 몸까지 들림 받게 했습니다. 마지막 때도 반드시 그런 역사가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예배를 귀하게 여겨야 되며,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고기 씹듯이 씹기를 바랍니다. 고기를 씹어야 맛이 나고 사람들끼리도 대화를 해봐야 그 사람의 맛이 나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에 ‘죽음을 보기 전에 옮기었으니’라고 할 때에 그 “옮긴다”는 단어를 찾았더니 ‘변화되다, 바꾸다’라는 단어더라니까요. 그러니까 우리가 이 몸으로 올라가면 안 됩니다. 변화돼서 올라 가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 전 인류가 전멸되는 심판이 와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전 인류의 죽음을 안 보여줬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창세기5장 24절의 에녹이 ‘죽음을 보지 않았다’는 단어하고 요한복음 8장 51절에 ‘결단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는 이 단어하고 맞아 떨어지더라고요. 그래서 오늘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냐면 제사에 성공을 해야 됩니다. 가인은 제사에 실패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제사에 성공해야 하고 둘째로 봉사와 충성에 성공해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변화성도로써 주님께서 올라오라고 하면 우리가 구름을 타고 올라가게 된다고 했습니다. 며칠전에 TV에서 뉴스를 보니까 소련에 불덩어리 운석이 떨어지니까 맨 먼저 그것을 본 사람들은 ‘지구 종말이다’라고 외치면서 도망가는 장면이 나왔었습니다. ‘심판이다. 비행기가 떨어졌다. 위성이 떨어졌다’고 외치면서 도망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뭐냐면 불붙은 유성들이 공중에서 떨어져가서 천명이상이 다쳤다고 하는데, 그 지역에 막 불 덩어리가 쏟아 질 때에 집들이 파괴되고 사람들이 두드려 맞고 난리가 났었습니다. 만약에 그런 일이 서울 바닥에서 일어났다면 주님이 온다고 야단북새통이 안 나겠습니까? 소련에서도 사람들이 ‘지구 종말이 왔다’면서 막 도망가더라고요. 지금 축구장 절반만한 운석이 또 날아오다가 지구를 비켜지나갔다고 하죠? 이런 일들은 전부다 뭐냐면 우리에게 “이것들아 땅만 보지 말고, 정신 차려라. 너희도 에녹같이 되고 싶거들랑 제사에 성공해라, 그 다음에 봉사에 성공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분명히 하나님께서 죽음을 보지 않고 올리우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분명 죽음을 눈으로 보는데 왜 보지 않고 올린다”고 그랬을까 하고 늘 이상하게 생각했었거든요. 분명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은 진리가 아닌 것이 없는데, 어째서 죽음을 보지 않고 올라가겠다고 했을까 라고 생각 했었는데, 그 말 자체가 전 인류의 심판의 죽음을 보지 않고 올라가게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에녹은 그렇게 올라갔습니다. 마지막 때도 전 인류의 심판의 죽음을 보지 않고 올라가는 역사가 마지막 종들에게 분명히 있게 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들이 그 축복을 받으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