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9.09 19:20
예수 그리스도의 양과 타인의 양
(요한복음 10장 22-28절)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 다니시니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가로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케 하려나이까 그리스도여든 밝히 말하시오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오늘 제가 본문의 제목을 ‘예수 그리스도의 양과 타인의 양’로 잡았습니다. 본문 내용을 보면 수전절에 유대인과 예수님이 다투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수전절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잘 모르실 겁니다. 제가 전에 설명을 대충 한적이 있었는데 이 수전절에 대한 유래를 우선 말씀을 드리고, 오늘 유대인의 지도자들과 주님과의 다투는 내용을 가지고 우리가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주님이 오시기 전 BC168년경입니다. 수리아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장군이 2만의 군대를 데리고 예루살렘을 치러 왔었습니다. 이스라엘에 들어와서 예루살렘을 함락을 하고 많은 유대인을 학살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에 제우스 신전을 세웁니다.
거기다가 이스라엘 백성이 가장 가증하게 여기는 돼지를 잡아서 제사를 드리며 나쁜 못된 행동을 했습니다. 그래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기에 항거하지 못했습니다. 한 삼 년이 지나서 BC165년경에 독립운동가인 마카비와 그의 형제들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단합하여 일어날 때 국민들이 함께 봉기해서 일어났습니다. 총 궐기해서 제우스 신전을 제거해 버리고 외세를 몰아내고 성전을 다시 수리를 하고 정결케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그 더럽혀진 성전을 성결케 했다는 뜻으로 ‘수전절’이라고 하게 됐습니다. 수전절(修殿節)은 한문으로는 ‘닦을 수’ 자를 쓰고 ‘대궐 전’ 자를 쓰고 ‘마디 절’ 자, ‘절기’할 때 그 ‘절’ 자를 썼습니다. 원어에는 ‘엥카이니아’로 ‘새롭게 한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전을 새롭게 하여 이렇게 아름답고 성결하게 만들어서 매년 겨울에 이 제사를 드리는데, 매년 12월 중순경에 한 팔일 정도 이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수전절입니다. 쉽게 말해서 그 수리아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장군이 예루살렘을 치고 들어와서 성전을 빼앗고 거기다가 제우스 신전을 섬기고 우상의 제물을 놓고 제사를 드리던 그 성전을 이제 마카비 형제가 일어나고 국민들이 단합해서 그 외세를 몰아내고 성전을 다시 성결케 해서 이제 하나님 앞에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그 절기가 수전절인 것입니다. 이것이 매년 겨울에 12월 중순경에 드렸는데 그 기간 동안에는 집집마다 기름으로 등불을 켜서 밝혔습니다. 그래서 “빛의 축제일이다”라고도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암울하고 정말로 그렇게 고되고 괴로웠던 그 기간 동안에 ‘구원을 밝혀주십사’ 라고 하는 뜻으로 등불을 밝혔던 겁니다. 그런데 이 절기 제사는 구약 때는 없었습니다. 구약 마지막 예수님 오시기 전 165년경부터 이 수전절이라는 것이 생기기 시작했지요?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 하필 이 성전을 정결케 하고, 성전에 불을 밝히며 수전절 지키는 이날에 그 성전에 왔습니다. 그리고 또 여기 행각에 다녔다고 했는데 ‘행각’이라는 단어가 ‘스토아’로 ‘현관’이라는 뜻입니다. 집의 한 부분으로 안뜰이나 성문에 달아서 짓는 집인데, 요한복음 5장 2절에 보면 베데스다 연못가에 행각 다섯이 있었다고 기록이 되어있지요? 그런데 왜 예수님이 하필 이 수전절날, 이 암울했던 날을 기억하면서 불을 밝히고 있는 이 절기 때 예수님이 나타났을까요? 예수님은 빛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참 메시아이기 때문에 그들이 절기를 지키는 그 절기 때에 예수님이 오셔서 그들을 만났으나 그들은 예수를 모르고 있습니다. 오늘 여기 22절 이하에 보면 뭐라고 말씀했습니까? ‘예루살렘에 수전절이니 때는 겨울이라’ 그랬지요? 성전을 다시 수리하고 정결케 해서 드리는 기념일인 수전절인 겨울에 예수님께서 솔로몬 행각에 다니다가 유대인과의 충돌이 벌어집니다. 여기에 본문에는 유대인이라고 되어있지마는 율법학자들과 교권주의자들입니다. 일반인들이 예수님과 충돌 잘 안 합니다. 그 공회원들, 율법학자들, 교권주의자들, 이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시비를 걸고 싸움을 겁니다.
그러면서 ‘우리 마음을 언제까지 의혹할 것입니까?’라고 하죠. 이 의혹이라고 하는 이 단어가요 원어에는 ‘들어 올리다’라고 하는 뜻입니다. 이 말은 ‘우리 몸과 마음을 당신이 언제까지 빼앗아 흔들고 있겠습니까?’라는 말입니다. 여기 ‘마음’이라는 단어가 ‘푸쉬케’로 생명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몸과 마음과 그 모든 것을 당신이 언제까지 이렇게 빼앗아가고 있을 겁니까라는 겁니다.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이 늘 “나는 선한 목자다”, 또는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내가 생명의 떡이다”라는 말씀을 하니까 언제까지 이런 소리나 하고 다니면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빼앗아 가렵니까라는 겁니다. 즉 실제적으로 그리스도라는 것을 왜 나타내지 못합니까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유대인 마카디가 혁명을 일으키면서 수리아 군대를 몰아내고 예루살렘을 회복시키듯이 당신이 메시아 같으면 마카디만도 못하지 않느냐? 당신이 우리를 로마 압제로부터 해방시켜야 메시아 같지, 우리 민족은 로마의 탄압을 받고 있는데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지 않느냐“라며 이렇게 시비를 걸고 있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이 유대인들은 메시아 관이 너무나 잘못되어 있습니다. 성경대로 오신 메시아를 기다리지 아니하고, 로마 제국을 타도하는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치적인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이 정반대로 기다리다가 참 메시아 앞에 서 있으면서도, 그 메시아를 만나고 있고, 메시아의 소리를 듣고 있으면서 메시아인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 이 시대도 기독교인들이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면서도 성경말씀대로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지 못하고 있다가 부끄러움을 당할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 말씀을 듣고 계신 여러분, 우리는 반드시 말씀대로 기다리는 메시아관이 여러분의 신앙사상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말을 믿지 아니하는 것은 내 양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시편 100편 3절에 보면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요 우리는 그의 것이고 또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는 양이라” 그랬습니다. 왜 하나님의 백성을 양이라고 할까요? 예수님도 어린양이라 그랬습니다. 왜 예수님이 양이라는 소리를 많이 하고 있느냐면 양은 절대적으로 목자 없이는 살 수가 없습니다. 양이 있는 곳에는 절대적으로 이리가 주위에 맴돌고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 천국을 향해 가는 성도들이라면 사탄이 여러분 주위에 항상 맴돌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목자장이신 주님의 보호를 받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지켜주지 아니하면 우리는 언제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너희가 믿지 아니하였다”고 하면서 주님이 나타낸 모든 일들은 메시아를 나타내는 것인데, 너희는 불신앙으로 나에게 도전하고 있지 않느냐고 하십니다. 절대로 “내 양은 내 음성을 듣고 안다. 너희들이 믿지 아니하는 것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이들이 누구의 양입니까? 타인의 양이죠. 오늘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에 속한 양이기를 바랍니다. 그 음성을 듣고 알기를 바랍니다. 오늘 음성이 뭡니까?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이 말씀이 내 마음에 새겨져야 됩니다. 혹시나 옛날의 저같은 분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목사되기 전에, 결혼하기 전에 교회에만 오면 왜 잠이 그렇게 옵니까? 특히 성경 볼 때는 안 오고 설교 할 때만 잠이 옵니다. 지금 성가대원들도 혹시 조는 분이 없습니까? 분명히 있을 겁니다. 제가 그랬어요. 저 자리에 앉아서 조는 정도면 대단하거든요. 그래도 졸리거든요. 절대 성경이 내 마음에 와 닿지를 않습니다. 이건 어쩔 수 없더라고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제 마음 속에 밝은 후레쉬같이 불을 확 비춰주는 그런 체험을 하고 나서는 “아 이 말씀이 이렇게 빛이라더니 과연 이렇구나!”라고 하는 고백을 하게 되었는데 그것도 결혼하고 나이가 들어서야 그랬습니다. 제가 성가대도 해봤고 중, 고등부 부장도 안 해봤습니까? 그런데 성경 말씀이 그저 소리로 지나 가버리고 맙니다. 정녕 그렇게 되면 그 자체가 성장이 안 됩니다. 여러분, 말씀을 듣고 아멘이 와야 되요. 이 말씀이 생명의 떡이라고 했고, 내 영혼이 사는 말씀이라고 하고, 이것이 갈증을 풀어주는 말씀이라고 했는데 이는 내가 열려고 해서 열리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열어줘야 됩니다. 제가 느껴보니까 그렇더라고요. 열심히 와서 듣다가 보면 어느 날 갑자기 두들겨 줍니다. 아무리 예수를 어릴 적부터 모태에서부터 믿었다고 그래도 이 말씀이 나에게 확 부닥치지 않으면 이건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열어주시면 어느 순간에 뒤집어져 버립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그리스도께서 하신 이 말씀이 믿어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태복음 24장에 보면 “천지는 없어져도 내가 내 입에서 나간 말은 절대 안 없어진다” 그랬습니다. 여러분, 그 말씀들은 장래에 되어질 일인데 주님은 무수히 말씀했습니다. 한 말씀이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유대인은 이 소리를 듣고도 예수를 비방하고 모함을 하고 그 말씀이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메시아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는가? 그들이 율법만 가지고 기다리는 메시아는 이런 연약한 메시아가 아니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절대 고관대작들을 만나지 않았습니다. 율법학자들과 친숙하게 지내지 않았습니다. 그늘에 가려진 자들, 병든 자, 약한 자, 우는 자. 정말로 이들과 어울려 다니니까 예수님의 수준이 얼마나 낮아지는지 모릅니다.
오늘 여러분, 내가 누구를 상대하느냐에 따라서 내 입지가 달라집니다. 내 수준이 달라집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를 바라볼 때 ‘이거는 아니야’라고 했습니다. 그분이 가장 낮은 곳의 천한 사람들, 세리와 창기들, 이런 자들과 어울리는 그가 어떻게 이스라엘 민족의 메시아가 된다 말인가? 라고 생각하다보니 예수를 깔보고, 모함하고, 미쳤다고 하고, 귀신 들렸다며 아무 허무맹랑한 소리를 했던 자들이 유대인들입니다. 또 특히 지도자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는 내 양이 아니다” 라고 그랬습니다.
오늘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그리스도의 양이길 바랍니다. 타인의 양이 되지 않은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내 양은 내 음성을 듣고 안다. 나도 그 양을 안다” 그랬습니다. 본문 4절, 5절에 보면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온다” 그랬습니다. “내 양은 내 음성만 알고, 내 음성만 믿고 따르지만 타인의 음성은 따르지 아니 한다” 그랬습니다. “내가 참 목자요, 내가 너희의 메시아요, 인도자로 왔는데도 안 따라 오는 것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선한 목자라 그랬지 않습니까?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오늘 예수님의 음성이 뭐냐면 말씀입니다. 그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그 자가 그의 양입니다.
그리고 오늘 여기 왜 중요하게 이 말씀을 많이 하는가 하니까 영생 문제가 나옵니다. 여러분, 제일 중요한 것이 뭡니까? 영생이에요. 어제도 어떤 90세가 훨씬 넘은 권사님이 당신은 매우 건강하다면서 건강을 자랑해요. 그런데 천국을 가고 싶은 마음은 한 마음도 없는 거 같더라고요. 그래도 권사정도라면 천국이라는 소리를 한 번은 해줘야 되는데. 천국이라는 소리는 싹 다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내가 오래 살고, 통닭 한 마리를 다 뜯어 먹고, 또 고기 3인분을 혼자 다 먹는다’면서 자랑하더라고요. 우리가 보통 생각할 때는 자랑해야죠. 건강 자랑해야죠. 그러나 사는 목적이 뭐여야 되냐면 그 나라에요. 절대로 그 나라를 소망한 말씀을 해야 되요. 그렇지 않고는 우리가 아무리 오래 산다고 하는 것이 의미가 없습니다. 목적이 없습니다. 차라리 그러면 학이나 거북이는 천 살을 살고 있는데 얼마나 장수합니까? 그러면 그들보다 못하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가 얼마를 살든 간에 이 땅 위에 사는 동안에 주님을 위해서 살아야 됩니다. 여러분, 뭔가 사는 의미가 있어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여기 26절을 보세요. “너희가 내 양이 아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듣고 안다”고 했습니다. 여기 주님의 음성이 뭡니까? 그 때는 음성으로 했지만 오늘날에는 문자로 기록했습니다. 성경 한 구절, 한 구절 절절히 기록된 모든 말씀이 나를 위해서 기록되어 있다고 하는 것을 믿어야 되요. 우리가 수요일 날이나 금요일 날이나 주일 날이나 새벽에 말씀을 들어 볼 때 이런 말씀들이 없었더라면 오늘 나는 어떠 했을까라는 것을 느껴 본 적이 있습니까? 적습니까? 많습니까? 많아야 돼요. 정말로 이 말씀이 없었더라면, 이 기록이 나에게 힘을 주지 못했더라면. 우리의 사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모릅니다. 여러분, 자식을 낳고 살아보세요. 그 자식이 여러분에게 큰 호강을 시켜줍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정말로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만이 보여야 되고, 그 소리만이 들려야 되며,
오늘 말씀이 그의 음성으로 들어와야 됩니다. 오늘 여기 예수그리스도의 양이라고 했는데 왜 그의 양이어야 하느냐면 영생문제가 걸려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양이 영생하면 뭐합니까? 여기 양은 순종하는 성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목자를 따르는 성도, 지도자를 따르는 성도를 말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 여러분, 예수님이 ‘너희는 내 말을 못 알아듣고, 나를 따르지 아니하니 내 양이 아니다’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영생 안 준다는 소리입니다. 영생과는 담을 쌓은 ‘너희’라 이 말이에요. 그러면 내 말을 듣고 따르는 자에게 영생 주겠다는 거예요.
오늘 여러분, 여기의 영생을 죽은 후에 부활하는 영생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천지창조 이후 육천년 역사에서 죽을 자가 죽지 않고, 썩을 자가 썩지 아니하고 사망을 삼킨다는 고린도전서 15장 51절, 52절, 53절 말씀이 응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릴 자가 나옵니다. 사람이 낳을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다 그랬습니다. 그런데 모든 육체는 죄로 인하여 다 죽고, 다 썩어지고 그 영혼은 낙원에 가서 부활을 기다리지만 “너희에게는 큰 비밀이 하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 다 잠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날에 잠자는 자와 죽은 자는 부활하지만 너희는 눈 깜짝할 사이에 홀연히 변화해서 주 앞에 설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여러분을 사로 잡아줘야 됩니다. 우리가 여기다가 초점을 걸어놓고, 여기다가 목적을 둬야 사는 맛이 있게 됩니다. 여러분, 먹어도 목적을 가지고 잡수세요. 건강도 목적을 가지고 건강하세요. 그래야만이 주님이 기뻐합니다. 왜냐? 이 예수그리스도는 영생을 가지고 계신 목자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늘 땅 아래에 영생을 가지고 계신 목자를 봤습니까? 예수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내 양이 아니라고 하는 말은 영생을 안 준다는 소리입니다. 내 양이 되면 영생 준다는 겁니다.
여러분, 내가 귀한 것이나 좋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 누구에게 줍니까? 사랑하는 자에게 줍니다. 예수님이 가장 사랑하는 자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자요, 이 말씀을 믿고 따르는 자입니다. 여러분 꼭 말씀이 주의 음성인 줄로 믿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나는 저희를 안다”고 했는데 저희는 누구입니까? 따르는 양입니다. 또 “저희도 나를 안다” 그랬습니다. 왜? 참 목자를 바로 알기 때문에 따라 온다고 그랬습니다.
왜 그런지 28절에 그 목적입니다. 가장 중요합니다. “내 양은 영생을 주겠다는 겁니다”. 영생을 가지고 계시는 목자이신 주님께서 “자기를 따르는 자에게 영원히 멸망치 아니하는 영생을 주겠다”고하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부활하는 것을 말하는 영생이 아닙니다, 이제 주님이 오시는 날에, 세상 끝 날에 우리에게 오는 영생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여러분에게 확정이 됐다면 오늘의 고난과 시련과 역경을 넉넉히 이기고도 남습니다. 자, 여러분, 엊그제 이런 글씨를 봤는데 ‘내가 이 땅에서 없어지거나 내가 이 땅에 떠나버리면 좋겠는데 나를 철석같이 믿고 의지하는 자가 몇 사람 있기 때문에, 그 사람 때문에 고생을 할 수밖에 없다’고 했어요. 나 혼자만 생각하면 이 세상 떠나고 싶고, 떠날 수 있는 길이 있는데도 나를 철석같이 믿고, 나를 의지하는 그 사람에게 실망을 주지 않기 위해서 내가 고달파도 살아가야 된다고 해 놨어요. 여러분을 그렇게 의지하는 자가 있습니까? 그 사람 때문에 살아야 됩니다.
마지막 날은 분명히 영생문제를 논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했는데 ‘저희’는 누구입니까? 따르는 자입니다. 그 따르는 그에게 영생 주겠다는 거예요. 여러분, 따라간다고 해서 빵하나 줘도 고맙고, 의복이나 좋은 선물 하나 줘도 고마운 일인데 영생을 준다고 그러면 이거 얼마나 감사합니까? 여기에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라고 했는데 이 말 자체가 원어에 ‘아폴뤼미’입니다. 아폴뤼미. 요한복음 3장 16절에 이 말씀 있지요?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를 보냈으니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고 했는데 ‘멸망’이란 단어가 ‘아폴뤼미’인데. 멸망하지 않겠다는 것은 ‘영생을 주겠다’는 겁니다.
오늘 여러분, 영생을 주는 목자이신 그 주님과 이 약속이 계약이 되기를 바랍니다. 계약이 체결 돼야 됩니다. ‘내가 너에게 반드시 영생을 줄 것인데 그 이유는 나를 믿고 따라오기 때문이다’는 것입니다. 그 음성을 알기 때문에 영원히 멸망치 않게 하겠다는 것인데 이 말은 사망이 근접하지 못하는 영생이라는 것이고, 사망이 엄습하지 못하는 영생입니다. 사망이 엄습하지 못한다면 사망과 싸워서 이긴 자입니다. 사망을 삼키는 자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25장에 “사망을 삼키는 자”가 나옵니다. 이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것이다”라는 것이 우리의 최고의 축복입니다.
그리고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다”고 했습니다. 여기 자꾸 ‘저희’가 나오는데 누굽니까? 참 목자이신 주님의 음성을 듣고 끝까지 따라가는 자입니다. 그런 저희에게 영생을 주고, 또한 아버지께서 저희를 나에게 주었기 때문에 그 누구도 영생을 가진 이 양들, 이 성도들은 주님의 손에서 어느 누구도 빼앗을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절대 주님이 여러분을 꽉 잡고 계시기 때문에 여러분을 빼앗을 자가 없다고 했으니 이것이 믿어져야 합니다. 그냥 말씀이구나 하지 말고 내가 영생을 가졌기 때문에, 내가 따라간 목자이신 주님이 나에게 영생을 줬기 때문에 그 영생을 가진 자를 누구도 뺏지를 못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건 기독교 역사의 최고의 축복 아닙니까? 그래서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주는 영생, 영생을 가진 자는 주님의 손에서 절대 빼앗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뺏길 수가 얼마나 많습니까? 뭐든지 뺏기는 게 참 많습니다. 우리가 건강도 뺏기고, 젊음도 뺏기고, 재산도 뺏기고, 얼마나 많이 뺏깁니까? 요사이 보십시오. 세상이 얼마나 악해졌습니까? 소돔 고모라보다 7배나 더 악해져있습니다. 여러분 점점점 더 악해집니다. 자 ,먹을 것이 없습니까? 입을 것이 없습니까? 놀이 기구가 없습니까? 그런데 왜 이렇게 악해져 가고 있습니까? 이것은 주님 오실 징조를 눈에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기도의 제목 줄때에 “시험에 들지 않게 해달라”고 하셨죠. 여러분, 나도 걸리지 않아야 되지만 자식들도 걸리지 않아야 되요. 그래서 주기도문에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시고 다만 악한 자에게서 보호해 달라”는 기도를 하도록 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영생할 자의 축복이 있기에 그렇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다고 하는 것은 전혀 전혀 주님이 놓지 않겠다는거에요. 여러분이 그렇게 되어진 줄로 믿습니다. 그런 종인 줄로 믿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내가 이 말씀을 믿어야 되요. 이 말씀이 믿어지는 것은 믿음은 아버지께로부터 주신 선물이라 그랬습니다. 의심했다가 믿었다가 하는 것은 안 됩니다. 이건 끝까지 믿어야 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양에게 영생을 주겠다고 했으니 내가 순종하는 양이 되어야 합니다. 절대 거역하면 안 됩니다. 의심하면 안 됩니다. 양은 그 목자 손에 죽더라도 발악을 하지 않습니다. 그게 양이에요. 그런데 오늘 이 양은 영생을 얻는 양이라고 그랬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얼마나 고맙습니까? 오늘 이 축복의 주인공이 여러분이 된줄로 믿습니다.
벌써 9월 달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제가 늘 애기하지만 1월하고 나서 조금 있다가 2월, 3월, 4월이라고 하지만 5월과 6월만 되면 7,8,9,10,11,12월 하고 빠르게 지나버립니다. 금방 금년도 가버립니다. 일주일도 그렇습니다. 주일 지나면 월 화 수목금토일 금방 가버립니다. 엊그제 같은데 금세 주일 왔잖아요. 이렇게 빠른 세월 속에서 우리를 기다리시는 주님, 영생 주기로 약속하신 주님이 오늘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줄 믿습니다. 반드시 이 말씀은 그 누구의 말씀이 아니라 여러분의 말씀이 된 줄로 믿습니다. 제가 읽었던 신문에 보니까 미국의 광우병 파동을 예언했던 우명한 사람으로 미국을 들썩이게 했던 사람이 한 말인데 2035년도에는 일본이 한국의 식민지가 된다고 하는 기사가 난 것을 봤는데, 되든 안 되든 제가 얼마나 통쾌한지요. 오늘 아침에 그 기사를 3번이나 읽었습니다. 일본은 한국 식민지가 되고, 만주 고구려 땅이 한국 땅이래요. 그래서 그 지역을 다 대한민국이 차지하게 될 것이다 라고 하는 기사가 나서 설령 안 될지언정 기분이 너무 좋더라고요.
오늘 여러분, 대한민국 땅에는 이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믿는 양이 많이 있습니다. 세계의 어느 나라보다도 이 나라에 가장 많이 있습니다. 그런 축복의 민족이기 때문에 오늘 여러분에 주시는 이 영생의 축복은 반드시 우리에게 크신 선물 될 줄로 믿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