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1.30 18:51
장자의 명분을 귀하게 여긴 자와 경홀히 여긴 자
(창세기 25장 29-34절)
오늘 제목이 ‘장자의 명분을 귀하게 여긴 자와 경홀히 여긴 자’입니다. 여기서 장자의 명분이란 일반 가정의 가장으로서의 복 받는 정도의 장자가 아니라 민족의 조상이 되는 장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장자의 명분을 쟁취하기 위해서 얼마만큼의 노력과 고생과 어려움이 있었어야 하는 가를 오늘 본문을 통해서 살펴보면서 함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세우실 때에 “네 씨로 말미암아 모든 족속이 복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대통령이나 왕이 하는 소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여기 “네 씨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는데 그 아브라함에게 많은 어려운 시험과 고난과 말 못 할 시험들을 다 겪게 한 후에 그 씨인 이삭을 줬습니다.
그리고 이삭이 또 자라나서 그 아내 리브가를 얻어서 자녀를 생산하는데 쌍둥이를 낳습니다. 리브가가 결혼 후 자녀가 빨리 생기지 않아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는데 그 기도 응답으로 낳은 자식이 에서와 야곱입니다. 쌍둥이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형제간에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습니다. 생김새뿐 아니라 성격까지라도 아주 전혀 달랐습니다. 그리고 먼저 나온 에서는 몸이 붉고 털이 많다고 그랬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상징하느냐면 짐승을 상징하는 겁니다. 그리고 너무 털이 많기 때문에 갖옷 같다고 그랬죠? 이 ‘갖옷’이란 원뜻은 ‘털옷’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밍크옷 같은 털옷을 말할 때에 ‘갖옷 같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에서가 또 몸이 붉고 붉은 것을 좋아한다고 해서 그 별명을 에돔이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이 공산주의의 조상입니다. 거기에서 더 올라가면 붉은 용이 나오지요.
그런데 그와는 반대로 형님의 발목을 붙들고 쫓아 나온 사람이 야곱이지요? 로마서9장 11절에서 13절을 보면 야곱은 어미 뱃속에서 태어나기도 전, 선과 악을 알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한 가지 생각할 것은 오늘 이 시대의 맏아들인 장자와는 달리 이스라엘 민족의 족장 시대는 장자로 태어나는 것이 가장 영광이요 축복이었습니다. 장자는 가문의 대를 이어가고 나라의 복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장자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힌 애굽인들의 장자를 한 사람도 살리지 아니하고 다 죽여버렸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사랑을 받기로 예정을 입고 태어났는데 그 당시 야곱은 장자로 태어나지 못한 것을 늘 아쉬워했습니다. 그가 장자로 태어났다면 아브라함의 약속이 자기에게 내려올 텐데 그렇지 못해서 늘 아쉬워하고 괴로워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보십시오. 이 땅 위에서 기도의 응답으로 태어난 자식들이라도 두 부류로 나눠졌습니다. 오늘 이 시대 역시 예수를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도 두 종류가 있습니다. 그 두 종류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전부 나눠서 말씀하셨는데 매를 갈고 있어도 두 종류로 나눠졌고, 자고 있어도 두 종류요, 신랑을 기다려도 두 종류로 하나님의 백성 중에 반드시 두 종류가 있음을 말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 이제 우리는 그냥 태어나서 예수 믿다가 죽어서 부활하여 훗날에 무궁세계에 들어간다고 하는 그런 생각만 갖지 마시고, 성경이 나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인가를 알아야 하며, 왜 나를 통하여 무엇을 하시려고 이렇게 성경 말씀을 깨닫게 하게 하시는지를 바로 알고 마지막시대에 오늘 야곱에게 약속한 장자의 축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은 영적인 눈이 열리기를 바랍니다. 귀가 열리기를 바랍니다. 항상 야곱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모든 족속이 복을 받는다”고 하신 그 말씀을 알고 쟁취해야 되겠다고 늘 생각했으나 자기가 맏아들이 아닌 차자였기에 그것이 자기에게 해당이 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을 알고 그 장자의 명분을 항상 탐내고 있었습니다. 오늘 이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영생의 장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영생하는 그 주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탐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이 장자의 명분을 기어코 라도 움켜쥐려 했으나 그렇지 못해서 늘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야곱은 형을 붙들고 나왔기에 1분 1초도 먼저 나고 나중 난 것이 아니고 동일하게 나왔는데, 머리가 먼저 나왔다고 에서가 형이 된 것을 야곱으로서는 도저히 억울하여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야곱은 사랑 받기로 예정을 입었지만 그냥 복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예정을 입었다고 쉽게 축복이 굴러 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는 형에게서 장자의 명분을 반드시 뺏어 내겠다는 각오를 하고 형이 사냥 갔다가 오는 것을 늘 엿보고 있다가 가장 늦게 오는 그날에 길목에서 팥죽을 쑤고 떡을 준비했습니다. 이제 아니나 다를까 형님이 오니까 팥죽을 끓여놓고 형님을 맞이할 때에 에서가 “야, 내가 기진해 죽게 되었으니 그 팥죽을 나 좀 다오”라고 합니다. 여러분, 지금 야곱은 그 형님의 장자권을 빼앗으려고 길목에서 계획대로 하고 있는데 에서는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본문에 뭐라 그랬습니까? “내가 죽게 되었는데 장자권 그까짓 것은 네가 가지라”고 합니다. 이것은 계약서를 쓴 것도 아니고 구두입니다. 말로 한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 주님 나라에 갈 자들은 말의 열매가 있을 줄 믿기를 바랍니다. 그 말의 역사가 나타난 줄 믿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형님과 야곱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인간적으로서는 용납이 안 되죠? 여러분 어떻습니까? 형제간 사이에서 어떻게 생각하면 좀 지나친 것 같지 않습니까? 이것은 가족애도 없는 것 같고, 형제의 우애도 없는 것 같고, 도덕적으로도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요 너무나 야비한 행동입니다. 너무 야비한 행동 아닙니까? 배고파서 기진맥진해 돌아오는 형님 앞에 “내가 이럴 줄 알고 준비해 놓았으니 이것을 드십시오”라고 해야 되는데, 장자권을 내노라고 하니 세상 윤리나 도덕으로는 도저히 맞지 않는 소리입니다. 용납될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형님의 입으로라도 장자권을 나에게 넘겨주겠다고 해야 팥죽을 주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에서가 “그래 가져라!”라고 합니다. 이것이 뭐냐면 에서는 하늘의 축복을 등한이 여긴 겁니다. 오늘 이 자리 계신 여러분, 내가 육신의 삶을 위해서, 땅의 것을 위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등한히 여기면 장자권을 놓치는 것과 동일합니다. 제가 그 당시의 장자는 단순한 가정의 장자가 아니라고 그랬죠? 그래서 결국은 야곱이 이스라엘 민족의 족장이 됩니다. 이걸 야곱이 움켜쥐려고 하는 겁니다.
오늘 이 자리 계신 여러분, 하나님은 자기의 사명을 움켜쥐려고 할 때, 기어코라도 이것을 빼앗아내려고 할 때, 윤리와 도덕을 초월했어도 하나님이 인정해버립니다. 지금 생각하면 매 맞을 짓 아닙니까? 그리고 그 문제만이 아니고 아버지를 속입니다. 무엇을 위해서? 장자 권을 빼앗아내기 위해서입니다. 제가 이것을 보다가 딱 스쳐가는 것이 마태복음 1장의 족보에 나오는 다말과 다를 바가 어디 있으며, 기생 라합과 다를 바가 어디 있고, 룻과 다를 바가 어디 있는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들은 자기의 사명을 움켜쥐기 위해서 땅의 윤리와 도덕은 던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편에 서주셨습니다. 에서는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하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면 ‘하나님이 나를 택했다면, 사랑했다면 가만히 있어도 복을 안 주겠나? 내가 가만히 있어도 하나님이 나에게 복 주실 것이다’라고 할수 있지만 야곱의 복은 찾아가는 복이었습니다. 야곱의 복은 쟁취하는 복입니다. 야곱의 복은 윤리와 도덕을 초월해버렸습니다. 기어코라도 축복은 내가 움켜지겠다는 겁니다.
오늘 여러분은 예수그리스도께서 허락한 그 주님의 나라를 내가 어떻게 해서라도 움켜쥐겠다는 이 사상을 갖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야곱의 길입니다. 좋은 게 좋은 것이 아니에요. 생각해보십시오. 형은 그것을 농담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오늘 또 동생이 제법 나를 웃긴다는 식으로 그냥 허술하게 생각했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네가 가져라”고 하니 “형, 맹세하시오”라고 하니 목구멍에 넘어가는 빵 하나 때문에 맹세함으로 엄청난 하나님의 축복을 포기하고 맙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분 중에는 그런 분이 없습니까? 그 나라의 놀라운 축복과 놀라운 역사와 약속 때문에 오늘 우리가 여기까지 왔는데 그저 우유부단하게 되는대로, 그저 적당히 생각하는 분은 없습니까? 그럼 반드시 빼앗기고 놓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천국은 침노(아고니조마이)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가 빼앗아낸다”고 했습니다. 그런 자의 천국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천국을 쟁취하는 축복은 십자가상에서 구원을 받은 우편 강도나 삭개오와 같이 죄를 고백하는 그 자리에서 이뤄지는 구원과 다릅니다. 이것은 영과 육이 영생하는 구원이요, 그 목적 하나를 쟁취하기 위해 생명을 걸고 싸워서 쟁취하는 구원입니다. 자, 여러분, 야곱의 장자가 그냥 명예심입니까? 아닙니다. 그 장자의 축복은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축복권인데,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통하여 반드시 나라가 형성될 것을 약속한 것이 이워질 때에 실제로 누리는 축복입니다. 그러니까 실제로 그 나라가 형성되는 주인공은 자기가 되어야 되겠다는 것이 야곱의 믿음입니다. 형을 제치고 그것을 얻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거기서 12족장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리고 거기서 12족장이 이스라엘 민족의 나라를 세웁니다. 그게 누구의 나라입니까? 야곱의 나라입니다. 그것을 야곱은 노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노리고 형도 제쳐 버렸습니다.
여러분 보십시요. 자기가 아버지를 속이고 이제 장자의 명분을 받아야 되겠는데 형님은 갖옷 같고 털이 많은데 자기는 매끈매끈하니 도저히 안 되니까 어떻게 변장을 해서라도 축복을 받아내려고 염소의 가죽을 벗겨서 몸에다가 두르고 아버지를 속이고 들어갑니다. 만약에 그 때에 하나님이 ‘에라이, 지 애비도 속이는 저놈은 맞아 죽을 놈이다’라고 하지 않고 야곱 편에 딱 선다니까요. 그 이유는 뭘까요? 사명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땅 위에 태어난 목적이 뭐냐면 사명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하보다 귀한 것이 생명이라면 그 생명보다 귀한 것이 사명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사명 때문에 존재한 줄을 믿기를 바랍니다. 자식 장가보내고, 시집보내고, 사업에 출세하고 하는 것이 인간이 사는 목적이 아닙니다. 새끼 낳고 사는 것은 동물도 마찬가지입니다. 동물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사명이 없지만 인간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 땅에 왜 태어났는가를 잘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지난번에 내가 이 땅에 온 것을 내 스스로 축하하라고 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땅에 온 것은 우연한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 오고 싶어서 온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나를 이 땅에 왜 보내셨는지 그 목적을 아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에서는 생명을 죽이는 사냥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몸이 붉다고 하는 것은 마귀의 색깔이라는 것이고 털이 있다고 하는 것은 짐승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은 제2의 야곱이 되기를 바랍니다. 제2의 야곱은 사명을 놓치지 않아야 됩니다. 때로는 아버지를 속이기 위해서 짐승의 가죽을 몸에 바르고 아버지에게 가서 “아버지! 에서가 왔습니다”라고 하니까 “그래, 네 음성은 야곱의 음성인데 몸을 만져보니까 에서 같구나”라고 하죠. 그 때 야곱의 마음이 얼마나 조였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만약 우리가 아버지를 속인다면 “내가 네 놈한테 속았다”면서 축복 대신에 저주가 내릴 것입니다. 그래서 가슴을 조이고 하는데 그 야곱 뒤에 누가 계셨느냐면 도와주는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 뒤에 누가 계시냐면 성령의 역사가 여러분을 돕고 있습니다. 야곱 혼자는 아무리 사명이 있지만 될 수가 없습니다. 야곱 자기 혼자는 아무리 원한다고 해서 될 수가 없습니다. 사랑과 긍휼과 자비가 그 뒤에서 어머니라는 옷을 입고 버텨줬기 때문에 아버지 앞에 들어갔습니다. 오늘 여러분, 이것을 보면 다말도 그랬습니다. 다말도 들키면 죽습니다. 화형 당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다말 편에 선다니까요. 세상에 능지처참을 해야 되고, 화형을 하고, 돌에 맞아 죽어야 되는데 사명 때문에 발버둥치는 그 여인 편에 하나님이 서 주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야곱에게 약속한 “네 후손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고 모든 족속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겠다”는 그런 소리를 야곱은 움켜쥐고 있었으니 “나는 어떻게 해서라도 형님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들어가야 되겠다”고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진리 싸움입니다. 여러분은 그 싸움에서 이기기를 바랍니다. 그 야곱이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것입니까? 하나님께로부터 내리는 장자권입니다. 그 장자권이 무슨 장자권이냐면 민족의 조상이 되고 나라의 족장이 되는 축복입니다. 그 하나님의 약속을 야곱은 움켜쥔 것입니다.
야곱은 반드시 큰 민족을 이뤄야겠다는 집념을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주님의 나라에 가서 해와 같이 빛난다고 하는 약속을 잊어버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약하고 부족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처지를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이런 것과는 거리가 너무 멉니다. 그러나 내게 성령의 역사를 해주시기 때문에 내가 그렇게 되도록 인도함을 받게 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제가 본문 말씀을 보면서 “아, 그렇군요. 아브라함의 신앙에 도전하는 다말이나 기생 라합이나 룻이나 모두 다를 바가 없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여러분, 야곱이 이 축복을 받아내는데 얼마나 어려웠겠으며,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또 마음의 갈등이 없었을까요? 다말이 자기가 저지른 사건 때문에 뒤에 오게 되는 문제를 생각해봤다면 얼마나 그 일을 하면서 갈등을 느끼겠습니까? 야곱이 형 앞에 아버지를 속 일 때까지 참으로 갈등이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야곱 편에 서주셨다고 하는 것은 사명의 특권입니다. 그런 특권을 여러분들이 갖기를 바랍니다. 그런 특권을 내가 움켜쥐었다면 놓치지 말기를 바랍니다. 야곱은 도저히 이를 수가 없는 일인데도, 도저히 할 수도 없는 일인데도 오직 그 목적 하나 때문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해내므로, 12지파의 조상이 됐다고 하는 것, 12지파의 족장 중에 족장이 됐다고 하는 것은 야곱에게 내려온 특권입니다. 그가 만약에 옆 눈질 했다면, 옆을 봤다거나 뒤돌아 봤다면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 야곱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왕궁이 세워졌습니다.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세우신 선민이 야곱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은 현대판 야곱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언적인 야곱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사명을 위하여 내가 욕을 먹는다고 해도, 사명을 위하여 내가 생명을 던졌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이들을 통하여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를 세울 겁니다. 이 종들을 통하여 주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줄로 믿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우리에게 예비한 축복은 굴러오는 축복이 아닙니다. 찾아가서 쟁취하는 축복입니다. 숨 돌릴 시간이 없습니다. 다른 거 생각할 시간이 없습니다. 어제 어느 장로님을 만났는데 그분이 하시는 말씀이 ‘목사님, 주님이 내 대에 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라고 해서 제가 ‘장로님 그러면 안 됩니다’라고 하면서 왜 그러냐고 했더니 자기가 죄가 많아서 그렇다고 해요. 오늘 여러분, 죄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제가 그때 딱 그랬습니다. ‘오늘보다 내일이 더 악해집니다. 금년보다 내년이 더 악해집니다. 내년보다 그 후년이 더 악해집니다. 악해지면 악해 질수록 나는 죄의 때가 더 묻게 되어 있다’고 그랬습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 70년 동안 던져졌다가 70년 만에 나올 때에 죄를 다 용서 받았기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70년이라는 약속 때문에 나온 겁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 입니다’라고 했더니 그 장로님이 은혜를 받아요.
주의 재림은 죄인을 심판하러 오신다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날마다 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면서도 죄를 짓고, 듣는 것으로 인하여서나 잘못된 판단을 하므로 죄를 짓고, 약하고 미련해서 짓는 죄도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날마다 예수의 피로 사함을 받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는 천국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주님 앞에 고백하여 용서함 받고 그러다가 주님오실 때에 맞이하는 것이지 만약에 내가 스스로 정결케 한다고 하고, 완전히 죄를 없이 할 때에 주님을 맞이한다면 고손자까지 봐도 주님을 못 맞이할 겁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맡겨준 사명 때문에 용서해 주심으로 그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와 언약한 약속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정말로 우리는 사명이 명분이며 사명이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명을 귀하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여기 본문에 에서는 먹는 빵 때문에, 팥죽 때문에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겼다라고 했는데, 오늘날에 먹고 사는 빵 문제 때문에 사명을 던져버리는 자가 없습니까? 환경 때문에 이 축복을 등한히 여기는 자가 없습니까? 여러분, 나에게 어떤 환경이 오더라도 어떤 문제가 걸리더라도 ‘나는 윤리와 도덕적으로는 돌에 맞아 죽더라도 사명만은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고 해야 장자의 명분을 쟁취하는 제 2의 야곱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은 제2의 야곱이 되어 주의 나라에서 영생하는 장자의 축복을 누리는 귀한 종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