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안식년의 축복과 우리의 자세
1) 안식할 때가 우리에게 남아 있다
이사야 56장 1절에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공평을 지키며 의를 행하라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 나의 의가 쉬 나타날 것임이라”고 했다.
가까이 온 구원은 우리가 처음 믿을 때보다 시대적으로 마지막 때에 나타나게 되는 구원이다(롬 13:11).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그 손을 금하여 모든 악을 행치 아니하여야 하나니 이같이 행하는 사람, 이같이 굳이 잡는 인생은 복이 있느니라”고 했다(사 56:2).
안식일을 거룩히 지켜 오염(汚染)시키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굳게 잡고 살아가는 사람은 복이 있다는 것이다. 안식일을 잘 지키며 하나님의 기뻐하는 일을 선택하며 언약을 굳게 잡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성 안에서 자녀보다 나은 기념물(記念物)과 이름을 주며 그 영광이 끊이지 않게 할 것이라고 하였다. 하나님과 연합된 자로서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고 언약을 굳게 지키는 자마다 생명나무 열매가 있는 나라에 인도하여 기쁨을 누릴 것을 약속하셨다.
주님을 맞이할 백성들은 이 안식일을 거룩히 잘 지키다가 참안식의 땅에 들어가서 영광을 누리는 복을 약속해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고 기록된 말씀을 눈여겨 보아야 한다. 신약시대에 성도들이 가장 두려워할 것은 가나안 땅의 안식이 성도들 앞에 남아 있을지라도 들어가지 못할 자가 있다는 것이다.
히브리서 4장 1절에 나오는 “우리”는 신약시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은 자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이다. 천국 고향을 찾아가는 자들은 안식일을 바로 지키고 순종하면서 두려운 마음으로 지내야 함을 경고하고 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같이 피의 언약을 가지고 약속의 땅을 향해 출발하였으나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실패한 전철(前轍)을 밟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도 모든 백성이 안식에 들어갈 약속을 받아가지고 살아가지만 도중에 탈락하는 자들이 분명히 있게 된다. 주께서 안식의 날을 약속해 주셨는데 감사히 받아들이지 않고 말씀을 거역하다가 시험에 빠지면 신앙의 병이 들기 쉽다. 병든 원인을 즉시 돌아보고 회개한다면 치유가 되지만 그 책임을 남에게 돌리고 원망하게 되면 마음이 악해지고 모든 것이 부정적으로 보이게 된다. 이러한 사람들은 입에서 나오는 대로 원망과 불평을 쏟아내고 하나님의 사람을 대적하다가 비참하게 쓰러지게 된다.
고린도전서 10장 1절에서 6절까지를 보면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다.
미혹받은 다수보다 진실하게 순종하는 소수를 기뻐하신다는 것이다. 신령(神靈)한 식물을 먹고 신령한 음료(飮料)를 마셨을지라도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이나 이방 여자와 간음하는 자들이나 하나님이 쓰시는 종을 대적하거나 원망하는 자들은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쓰러뜨렸다. 이러한 일은 신약시대에도 고향을 향해 출발할 때에 가장 조심하며 두려워할 일이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도록 한 것이다. 똑같은 환경에서 목적지를 향해 함께 출발했으나 믿고 순종하여 고향 땅에 들어가는 자와 시험에 빠져 도중에 떨어지는 자로 나누어지게 하신 것이다. 과거에 가나안으로 가는 도중에 일어난 사건들은 오늘 우리에게 거울이 된다고 하였으니 거울은 곧 과거의 복사판이 되어 현재 우리에게 나타내신다는 것이다.
이 사건이 신약시대의 거울이라면 살아서 그 안식에 들어가지 못할 자가 너무나 많이 있다는 것인데 두려운 일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죽지 않고 이 안식에 들어가느냐 못 들어가느냐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여호수아와 갈렙의 신앙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출애굽 사건을 역사의 거울로 보면 불순종하고 대적한 20세 이상은 다 버린 것과, 20세가 안 된 어린아이들만 여호수아의 인도로 가나안에 들어간 것도 예사로 생각하면 안 된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마 18:3).
천진난만한 어린아이는 거역할 줄도 모르고 시키는 대로 순종을 잘하고 진실하기 때문에 위선(僞善)이나 거짓이 없다. 오늘날 우리 역시 진리 앞에 진실하고 어린아이같이 되어야 약속한 안식에 들어갈 수가 있다.
이 안식은 새 하늘과 새 땅인 천국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를 믿고 죽어 천당 가는 자들과 살아서 천국에 들어가는 축복이 서로 다르다. 우리의 영과 육은 죽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있으나 범죄하고 회개하지 못한 자들은 모두 사망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주님 오실 때까지 죽지 않고 살아남는 자 중에 말씀을 준비하며 거룩히 성별된 자는 영과 육이 살아서 그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 죽었다가 살아나는 부활을 놓고 영생을 말하는 것이 근본 목적이 아니다. 죽을 몸이 죽지 않고 썩을 육체가 썩지 않고 변화를 받게 될 때에 참영생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은 자들이 부활하여 들어가는 무궁 안식세계와 변화 성도들이 들어가는 천년 안식세계와는 너무나 큰 차이가 나게 된다. 일단 천년 안식세계를 거쳐서 무궁 안식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은 믿는 자의 최대 목표이며 영광스러운 일이다. 영과 육이 죽지 않고 살아서 들어가는 천국은 분명히 침노하여 빼앗는 자가 들어가게 되는 나라이기 때문에 비상한 각오와 결심이 있어야 한다(마 11:12).
하나님의 자녀 가운데 천국의 유업을 얻을 자녀에 대하여 계시록 21장 6절에 보면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遺業)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고 하였다. 천국의 아들 중에 유업이 있는 아들이 있고 유업이 없는 아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 유업을 얻기 위해서는 이기는 자라야 한다는 단서가 붙어 있으며 이긴다는 것은 어렵고 험난한 길이다. 믿음 하나만 가지고 걱정없이 편안하게 살면서 목마른 것조차도 모르고 살아가는 자들도 있지만 말씀에 목이 말라 갈급해하는 자들도 있다. 이 진리의 물을 찾아 헤메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생명수 샘물을 값없이 주겠다는 것이다.
생수의 말씀으로 영적 문제가 해결되고 거짓 선지자들의 미혹을 이길 때에 주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얻게 된다. 이긴 자들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참아들이 되어 왕궁 도성에서 영광을 누리는 축복을 받는다고 약속을 하였다. 여기에는 “믿는 자”라는 말이 없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기본이기 때문에 거론하지 않았을 뿐이다. 십자가 구속의 은총을 이미 받은 자들이 그 나라에 가서 유업을 얻으려면 어떤 환난이나 미혹이 와도 진리의 말씀으로 이겨야 참아들이 된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도 여러 종류의 아들이 있다. 결혼하여 얻은 아들과 외부에서 입양(入養)해 온 아들과 친구의 아들을 데려와 양육을 할 때도 이 아들들이 모두 아버지라고 부른다. 그러나 참아들은 피와 살을 이어받고 아버지의 호적에 오른 아들이라야 유업이 있는 아들이 되는 것이다. 십자가의 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 앞에는 약속된 유업이 남아 있지만, 이기는 자가 되어야 기업을 소유할 아들이 된다는 것이다.
2) 날에 대한 시비는 하지 말라
골로새서 2장 16절과 17절에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月朔)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貶論)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고 하였다. 구약의 모든 절기는 그림자이다. 예배는 형식적으로 드리면서 날에 대한 싸움이나 안식일에 대한 것은 서로 폄론하지 말라고 하였다. 이 모든 날들은 장래의 모형일 뿐이라는 것이다. 안식일은 훗날 안식년의 모형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로마서 14장 5절에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고 했다. 장래 일의 그림자인 날을 가지고 서로 분쟁을 하지 말고 날에 대한 판단을 말라고 했다. 어쨌든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동안에는 한 날을 정하여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데 어느 날이 좋겠는가? 주말, 주중, 주초 중에서 어느 한 날을 선택해 보라. 어차피 한 날을 정하여 안식일로 지킨다면 한 주간의 첫 날이 가장 적합할 것이다. 이 날은 사도 때부터 모였고 기도하며 헌금도 하였다.
우리가 생각해 보아도 주님께서 우리들을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 날을 안식일로 삼고 십자가 은혜를 생각하면서 늘 기념하는 예배가 참 좋을 것이다. 이 안식일 날은 주의 부활을 기념하며 지키는 안식일이기에 더욱 감사한 마음으로 열심히 지켜야 한다. 신약시대의 성도들은 주께서 부활하신 날을 참안식일로 지킬 것을 아무리 강조해도 무리한 말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날에 대한 생각보다 이 날을 어떻게 지켜야 참안식에 들어갈 수 있는가를 깊이 생각해야 하며 나와 안식일의 관계를 잘 설정(設定)해야 한다.
토요일 안식은 실패한 안식일이며 그 안식일을 지키며 가나안을 향해 가던 이스라엘 민족 자체도 실패한 민족이다. 약속의 땅을 향해 가다가 도중에 므리바 물 사건과(출 17:1 이후) 먹는 문제로 인해 민수기 11장 5절부터 나오는 사건 등을 가지고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다가 안식의 축복을 놓치게 된 것을 거울로 삼아 신약시대의 주의 백성된 자들도 이러한 오류(誤謬)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양의 피로 구속받은 자들은 광야에서 마음이 강퍅하여 불순종하다가 하나님을 격노케 하여 40년 간 그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졌다(민 14:29-34, 히 3:16-18). 이같은 사건을 바라본 오늘의 우리도 안식일을 지키며 고향 가는 길이 광야생활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어떤 문제에 부닥쳐도 방심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주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순종하는 것만이 살 길임을 명심해야 한다. 광야 길에서 많은 사람들이 원망하고 지도자를 대적했지만 한 번도 원망 불평 없이 끝까지 참고 기다려 승리한 여호수아와 갈렙도 역시 우리에게 모델로 보여주었다. 가나안으로 가는 도중에 일어난 구약의 사건이 모형이라면 신약시대의 우리들에게도 원망 불평이 반드시 오게 될 텐데 잘 이겨 나가야 한다.
특히 지도자를 원망하며 시비하는 일이나 생활과 환경의 불평은 대단히 위험(危險)한 일이다. 모든 여건이 순탄치 못해도 시험에 걸려드는 일이 없도록 신경을 곤두 세워 자신을 먼저 살피고 기도와 순종으로 승리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역사하는 시대의 종들과 분쟁하는 것은 스스로 자멸(自滅)하는 길이 된다. 어차피 이 길을 가야 한다면 앞선 자를 따라가야지 뒤쳐진 자를 따라 투덜대며 가는 자는 사탄이 노리는 대상이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시험받은 자를 모두 버린 것을 명심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순종하는 것을 배우고 협력하는 훈련도 받아야 한다.
모세를 원망한 고라의 일당이나(민 16:1-3,30) 다윗을 괴롭힌 사울이나(삼상 19장-24장)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 및 다니엘을 괴롭힌 자의 말로(末路)는 처참하였다(단 3:29, 6:24). 또 가룟 유다의 말로나 예수님과 제자들을 핍박하고 대적한 율법주의자들과 제사장이나 서기관들이 저지른 일에는 너무나 가혹한 대가를 치르게 된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사야 58장 3절부터 보면 안식일을 지키면서도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지 않고 인본주의 예배로 전락될 때에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지 않으셨다.
3) 안식일을 바로 잘 지키자
“이르기를 우리가 금식하되 주께서 보지 아니하심은 어찜이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주께서 알아주지 아니하심은 어찜이니이까 하느니라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찾아 얻으며 온갖 일을 시키는도다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다투며 싸우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너희의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 목소리로 상달케 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어찌 나의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그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 머리를 갈대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悅納)될 날이라 하겠느냐”(사 58:3-5).
안식일을 지키면서 오락을 즐기고(인본주의적 행동을 하고) 교회에서 분열을 일삼고 다투고 싸우는 자들은 안식 세계를 바라볼 수가 없다. 그리고 하나님께 열심히 충성한다고 하나 하나님과 무관한 일을 하는 자들이나 거룩한 모양만 드러내고 그 속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없는 자는 참안식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사람들은 신앙을 가졌다고 하면서 넓은 길로 가는 자들이다. 예수를 믿고 영혼이 구원을 받는 데는 문제가 없지만 참 안식이 있는 그 나라에 들어갈 자들에게는 편안하고 넓은 길로 간 것이 문제가 된다. 주님이 오실 때가 되면 더욱 안식일에 대한 중요성이 없어지고 옛날에 가졌던 믿음도 희석이 되어 신앙인의 모습을 나타내지 못하게 된다.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네 빛이 아침같이 비췰 것이며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고 하였다(사 58:6-9). 주린 자에게 식물을 나누어 주는 것은 생명의 양식이 없어 굶주리는 자에게 말씀의 떡을 공급해 주는 것이며(요 6:48-51, 7:37-38),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된 자가 시험이 들어 교회에 나오지 못하고 세상에서 방황하는 자를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는 것이며, 벗은 자에게 옷을 입혀 주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에게 구원의 옷과 의의 겉옷을 입혀서 주 앞에 설 수 있도록 준비시키라는 것이다(사 61:10).
계시록 3장 17절과 18절을 보면 라오디게아 교회는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흰 옷을 사서 입고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고 한 것은 세상의 옷이 아니다. 골육을 피하여 숨는다는 것은 세상의 피부치로 생각하면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의 백성된 자를 무관심하게 대하지 말고 돌아보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는 금식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신앙인을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환난 날에 실족하지 않도록 앞뒤에서 지켜주겠다고 하였다. 이런 종들은 재림의 아침을 볼 수 있는 자들이며 물댄 동산같이 강건케 하시고 진리가 풍성한 초장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치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업(業)으로 기르리라”고 하였다(사 58:13-14).
안식일에 세상 쾌락을 따라가지 아니하며 이 날을 축복된 날로 여기고 여호와 앞에 제일 좋은 날이요 존귀한 날로 여기는 자는 주님이 계신 높은 곳에 올리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한 기업을 누리는 즐거움을 얻게 하겠다는 것이다. 이 약속은 안식일과 안식 세계와 밀접한 관계성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주의 날을 잘 지키고 하나님의 기뻐하는 것을 선택하고 주를 섬기는 자에게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허락한 나라에 들어가서 길이 길이 복을 누리게 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귀는 어떻게 하든지 이 안식일을 바로 지키지 못하게 하여 그 축복을 누리지 못하도록 미혹하여 넘어뜨리려 한다.
사탄의 역사가 크게 나타나는 것은 마귀에게는 자기 때가 얼마 남지 않고 최후의 순간이 다가오기 때문에 발악을 하기 때문이다. 안식일을 잘 지키는 자에게 주의 나라를 유업으로 약속한 것을 사탄이 알고 안식일 예배를 희석(稀釋)시키고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게 한다. 지금 국가적으로 시행되는 주 5일 근무는 이러한 염려를 더욱 부채질하고 있다.
앞으로 주 5일 근무제가 실시될 때 신앙의 각오를 단단히 하지 않게 되면 안식일을 생각하는 마음까지도 도둑을 맞으며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에 휩쓸려 넘어지게 된다. 예배는 형식적으로 드리고 세상의 넓은 길을 따라 야외로 놀러 가거나 오락을 즐기게 되면 신앙의 정로에서 탈선이 되어 영생을 놓치게 된다. 안식일을 바로 지키지 못하고 등한히 여기는 자는 약속된 가나안 땅에 갈 수가 없다는 것을 성경은 말하고 있다.
마귀는 환경을 가지고 넘어지게 하기 때문에 조그마한 시험도 무관심하면 안 된다. 신실한 성도도 예배에 한두 번 빠지다 보면 점점 심령이 마비가 되고 굳어지게 되기 때문에 극히 조심해야 한다. 이사야 1장 11절에서 15절까지 보면 얼마나 종교가 부패했는지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고 하였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무엘상 15장 22절에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라고 하였다. 이사야 1장 12절에는 그러면서도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고 하였고 13절에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고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받기 싫다는 것이다.
또 13절 하반절에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고 하였다. 15절에는 아무리 많이 기도해도 그 기도를 하나님이 듣지 않겠다고 하였다. 얼마나 종교 부패가 무서운가! 오늘의 성도들이 각성해야 할 대목이다. 부패하고 형식적인 예배는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고 인본주의 예배 모임 자체를 하나님이 싫어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안식일을 귀하게 여기고도 엄숙(嚴肅)하게 예배를 드리지 않아서 하나님께서 마당만 밟고 돌아가는 “아무개야!”라고 한다면 얼마나 부끄럽고 괴로운 일이겠는가? 바쁜 일정 때문에 좇기다 보면 안식일을 그냥 범할 수는 없고 또 맘이 찜찜하여 새벽에 20, 30분 정도 잠간 다녀간 후에 모든 세상 쾌락을 즐기는 자들이 얼마나 있겠는가?
세상의 파도는 점점 거세지는데 요나같이 깊은 잠에 빠져든다면 오늘날의 기독교는 침몰할 수밖에 없다. 이제 교파나 교단의 이념(理念)의 벽을 넘어 이 시대의 풍랑은 나의 연고라고 엎드려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실직으로 실업자의 불안은 가중되고 가정은 좌초(坐礁) 직전에 놓여 있고 자녀들의 교육 질서마저 위험 수위에 놓였다면 무슨 위로를 어떻게 해야 좋은 처방이 되겠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품에 안겨 받는 위로가 가장 좋은 양약이 될 것이며 주님의 사랑의 손길이 가장 큰 평안이 될 때에 세상의 일들도 잘 풀리게 된다. 그러므로 세상의 넓은 길을 따라가며 방황하는 길에서 돌아서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를 기쁜 마음으로 드리고 안식일을 잘 지켜 축복을 받아 주님이 다스리는 그 나라에 들어가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끝-
(김경진 作)
우리에게 남아있는 안식의 축복을 위해 현재우리가 지키고있는
안식일를 잘지키여 그나라 천년 안식에 들어가게
하옵소서.
아멘
땅에속한자는 땅의소식이 궁금하듯, 하늘에 속한자는 하늘소식이
궁금합니다.매일 주님께 향하는 주파수를 잘 클릭하여주님의뜻에
순종하는 귀한종으로 쓰임받길 원하옵나이다*^^*
말씀만이 우리를 바른길도 인도하십니다 주님 끝까지 붙들수있도록 도와주세요
준비된 종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