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까?”라는 한 율법사의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와 같이 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해야 된다”고 하였다. 하나님의 자녀로써 마음과 뜻을 다하고 목숨까지 바쳐 창조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지만 나의 이웃을 하나님 사랑하는 것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은 납득이 안 간다.
주님께서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제일 큰 두 계명이라 했고, 두 계명은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의 법이라(마22:35-40,막12:30-31)했으며, 두 계명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똑같이 하라고 했다.
또한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보다 귀한 것이 이웃 사랑이라(막12:33)고 하였는데 그럼 과연 ‘이웃 사랑’을 하라는 것이 어려운 이웃에게 경제적으로 돕는 구제나 봉사 활동하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
사실 그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할 수가 있는가?
만약 세상에 사는 어려운 이웃에게 물질이 있어서 구제를 하면 좋겠지만 없어서 못한다면 영생에 대한 소망을 접어야 하는 것일까?
부모나 처자식보다 그 이웃을 더 사랑하라고 하시니 이 이웃은 보통 이웃이 아닌 것 같은데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이제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있는 이웃을 바로 찾아야 한다. 나를 위해 죽어주신 그 이웃보다 더 귀한 이웃이 어디에 있겠는가? 나의 어려움을 도와주고, 괴로움과 고통을 함께 해 주시고, 죽음의 구렁텅이에서 건져주신 그분, 이 땅위에 둘도 없는 예수님이 우리의 참 이웃인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나의 생명을 구해주신 나의 참 이웃을 위해 몸과 마음과 정성을 다하고 생명까지라도 바쳐 사랑하며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신 그분을 오늘도 주막인 교회에 엎드려 다시 만나 뵙기를 눈물로 기다려야겠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눅 10:25-28).
1. 이웃 사랑과 영생
예수께서 율법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영생과 관계된다고 말을 할 때에 어떤 이웃을 두고 말하는 것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영생을 얻는다는 조건 중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고 했는데 어떻게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할 수가 있겠는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영생 문제에 관계된다면 과연 그 이웃이 누구란 말인가? 만약 이웃을 물질로 돕고 희생적인 사랑을 할 때에 영생이 우리에게 이루어진다면, 개척교회(開拓敎會) 목사나 선교하는 분들은 생활의 여유가 없이 살아가는 것이 보통이며, 그러다 보니 돕기는커녕 오히려 도움만 받고 사는 형편이니 그들에게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세상에 사는 어려운 이웃에게 물질이 있어서 구제를 하면 좋겠지만 없어서 못한다면 영생에 대한 소망을 접어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현실의 생활에만 집착(執着)한 나머지 성경에서 말씀하는 내용을 깊이 생각해 보지 못하고 이웃 사랑은 막연히 세상적인 구제 활동으로만 알고 있었다. 예수께서 율법사에게 이웃 문제를 거론할 때에 우리 역시 아무 생각 없이 이웃의 의미를 등한히 여긴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형제간의 사랑이나 이성 간의 사랑뿐 아니라 부자지간에도 이 땅의 사랑은 한계(限界)가 있는데 어떻게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할 자가 있겠는가?
네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해야 영생을 얻는다고 말씀하셨으니 그 이웃은 보통 이웃을 두고 하는 말씀이 아니다. 영생을 얻는 문제에 있어서 가장 먼저 지켜야 할 큰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것인데 그것과 똑같이 이웃에 대하여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해야 된다고 하는 단서를 붙여 놓았다. 사실 부모나 처자식에게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할 수가 없는데 어째서 주님께서는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해야 영생을 얻게 된다고 하였을까(눅 10:25-28)?
이같은 사랑은 우리의 현실 생활에서 불가능한 일이다. 나의 식구도 내 몸같이 사랑을 못 하는데 가족이 아닌 다른 이웃에 대한 사랑을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아무리 영생과 관계되는 사랑이라고 하지만 누가 이 사랑을 자신 있게 계속 실천하겠다고 대답할 수가 있겠는가? 주님이 말씀하시는 이웃 사랑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次元)에서 말씀을 하셨기 때문에 지금까지는 그 뜻에 접근을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계속 모르는 상태로 있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사랑을 바로 알게 된 자는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이웃을 찾아서 사랑을 해야만 된다.
2. 가장 큰 두 계명
❑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율법사 중에 한 사람이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하고 물었을 때에 예수께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시면서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綱領, 크레마타이)이라고 하였다. 예수께서는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을 설명하면서 묻지도 않은 둘째 계명의 이웃 사랑을 연결하여 말씀하셨는데 여기에도 반드시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다(마 22:35-40).
첫째 되는 큰 계명에 들어 있는 분이 하나님이라면, 둘째로 큰 계명 속에 들어 있는 이웃(플레시온)은 누구라는 것일까?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법은 가장 큰 계명이 될 수가 있고 당연한 일이다. 성도가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형식(形式)이나 외식(外飾)이 있을 수 없고 진심으로 그분을 사랑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큰 계명 안에 들어 있다고 하는 둘째 계명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해할 수가 없다. 하나님 사랑에 목숨을 바친다면 순교(殉敎)가 될 수 있겠지만 이웃 사랑도 하나님 사랑과 같이 하라는 것은 납득(納得)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자기 부모 형제나 처자식보다 이웃을 더 사랑하기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똑같이 하라고 하시니 도대체 무슨 비밀이 담긴 이웃이기에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주님께서 말씀하신 내용 중에 숨겨진 이웃을 찾아보고 그분을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이다.
❑ 두 계명은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의 법이다
모든 계명 중에 가장 큰 계명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플레시온) 사랑이라고 하였다. 또 첫째 계명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였고 둘째는 첫째와 똑같이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였으니 이 두 최고 계명의 주인공(主人公)은 하나님과 이웃이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나눌 수 없는 두 큰 계명이라고 하면서 율법과 선지자의 대강령(大綱領)이라고 한 이유가 무엇일까(마 22:40)?
여기 ‘강령’이라는 단어는 ‘크레마타이’로 “묶어 놓다”, “매달아 놓다”라는 뜻이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율법 안에서나 선지자의 말씀 속에서도 큰 계명이므로 뗄 수 없도록 함께 묶여(매달려)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첫째 계명이나 이웃을 사랑하는 둘째 계명은 똑같이 큰 계명이니 분리하거나 따로 떼어 놓을 수 없는 계명이란 말씀이다. 원인과 결과가 떨어질 수 없듯이 뿌리와 열매의 관계처럼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불가분의 관계란 것이다.
주님께서 이 시간에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가장 큰 두 계명이 묶여진 이유를 물으시고 또 잘 지키고 있느냐고 질문을 하신다면 자신 있게 설명하면서 대답할 수 있는 자가 있겠는가? 당연히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계명은 성도들이 지킨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한다고 거리낌 없이 고백(告白)할 수도 없고 두 계명이 묶여진 이유 역시 설명할 수도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 향한 사랑의 계명도 완벽(完璧)하게 행한다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닌데, 어떻게 세상 이웃을 하나님과 같이 사랑할 수 있다는 말인가. 솔직하게 하나님은 사랑한다고 하겠지만 부모, 처자, 가족은 돌아보지 않고 이웃을 위하여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고 목숨을 바쳐 사랑한다고 하는 자는 지금도 없거니와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웃이 누구인 줄을 모르고 생명을 바쳐 사랑할 자가 있겠는가? 만약 사랑할 이웃을 알았다고 하여도 어떻게 하나님 사랑과 같은 사랑을 할 수가 있겠는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자신의 생명이 다하기까지 꾸준히 사랑을 하면서 모든 것을 의논하고 또 어려운 것은 하나님께 맡기기도 하지만 이웃에 대하여는 그처럼 계속 사랑할 수가 없을 것이다. 인간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사랑을 하다가도 멀리하고 돕다가도 지쳐서 중단하게 되는데 이같은 사람들이 이웃에 대하여 생명을 걸고 사랑한다는 것은 무모(無謀)한 행동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율법사에게 할 수 없는 일을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며, 특히 시험하기 위하여 찾아온 자에게 책(責)잡힐 말을 했겠는가?
주님께서 말씀하신 영생 문제는 율법사가 풀어야 할 과제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 해결해야 할 중요한 사건이기 때문에 어떻게 하든지 숨겨져 있는 이웃을 찾고 만날 수 있도록 노력을 해야 한다.
3. 첫째 되는 계명
“서기관 중 한 사람이 저희의 변론(辯論)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대답 잘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燔祭物)과 기타 제물(祭物)보다 나으니이다”(막 12:28-33).
❶ 첫째 계명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막 12:28-34)?
예수를 시험하기 위하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냐고 질문을 한 사람은(마태는 율법사라고 기록하였고 마가는 서기관 중의 한 사람이라고 함) 예수께 와서 큰 계명과 첫째 되는 계명이 무엇이냐고 질문하였다. 예수께서는 첫째 마음을 다하고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시면서 이곳에서도 역시 묻지 않은 둘째 계명까지 묶어서 하나님과 이웃에게 똑같이 사랑을 하면 이것보다 더 큰 계명이 없다고 하였다(마 22:39).
주님이 말씀하신 두 가지 큰 계명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인데 어느 하나도 소홀(疎忽)히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눈으로 본다면 하나님과 이웃이 큰 계명 안에 동일하게 들어 있는 것도 이해하기가 어렵고 둘 다 똑같이 사랑하라고 한 그 자체가 어불성설(語不成說)이 아닌가? 인간의 생각으로는 하나님과 이웃을 동일하게 사랑하라는 말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❷ 둘째 계명
하나님을 섬기며 사랑하는 첫째 계명과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는 둘째 계명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보다 귀한 것이라고 했다. 위의 문장 내용 중에 둘째 계명에서 이웃 사랑을 보면 명령법과 현재 능동태로 되어 있어서 반드시 하나님과 이웃을 자기 스스로 계속해서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법으로 되어 있다. 하나님을 사랑할 때에 따로 나눌 수 없이 이웃도 함께 똑같이 사랑을 해야 된다는 것을 법으로 정해 놓았다. 그리고 또 첫째 계명(하나님 사랑)과 둘째 계명(이웃 사랑)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귀한지 전체 드리는 번제물(燔祭物)보다 또 기타 제물(祭物)보다도 더 나은 것이라고 하였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이웃이 얼마나 대단하기에 이렇게 말씀을 하셨을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5대 제사(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와 3대 절기(유월절, 오순절, 초막절), 그리고 안식일, 상번제(常燔祭)에 드리는 모든 제물보다 이웃 사랑이 더 낫다고 한 것은 예사로운 말씀이 아니기 때문에 깊이 상고해 보아야 할 것이다.
야고보서 2장 8절에도 이웃 사랑이 최고의 법이라고 말씀하고 있지만 어째서 이웃 사랑이 최고의 법이 되고 가장 으뜸이 되므로 제물보다 더 낫다고 하는가? 마태복음 10장 37절에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필레오)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라고 했다. 그런데 주님께서 자기 식구보다도 이웃을 더 사랑(아카페- 아카파오에서 유래)하라고 하신 뜻이 무엇인가를 분석해 보면서 눈에 보이는 이웃, 내 주위에 있는 이웃 외에 감춰진 이웃이 누구인지를 다른 각도에서 찾아야 한다.
이와 같이 깊이 숨겨진 귀한 이웃을 반드시 찾아서 마음과 뜻(계획, 목적, 사상)과 목숨(생명)을 다하고 힘(능력,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여 사랑하라는 큰 계명대로 실천해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다고 하였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과 영생 문제를 묶어 거론한 것만 생각해 보아도 세상 이웃이 아닌 것이 확실하다. 그 이웃 되시는 분을 사랑할 때에 영생을 갖게 된다고 하니 윤리나 도덕적으로 나누는 교제와 사랑을 말하는 이웃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세상적인 사랑은 이웃에게 아무리 베풀었다고 해도 영생과는 관계가 없다. 오히려 세상적인 구제와 사랑은 불신자나 이교도들이 더 잘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성경을 더 깊이 보지 않았을 때는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죽을 때 영혼이 구원을 받아 천당에 가는 것으로도 감사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좋은 구원과 영생을 사모하고 찾아야 하는 것은 우리에게 주신 마지막 과제가 된다. 물론 죽음 이후에 구원받고 영생을 얻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이제 성경이 말하는 이웃을 찾고 영생을 얻는 과정을 확실히 알게 된다면 감사한 마음으로 그 분의 뜻을 따르고 순종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주께서 기뻐하시게 될 것이다.
4. 누가 우리의 참 이웃인가
지금까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할 때에 이웃에 대한 개념을 얼핏 생각하면 가장 가까운 아내를 위시하여 집안 식구들을 참이웃이라고 여겼고, 더 확대한다면 내 주위에 가장 가까이에서 함께 살아가는 자들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저 사회 공동체 안에서 생활하면서 평범하게 서로 만나는 사람들이라고만 여겨왔다. 그 이웃 외에 다른 이웃이 있다는 것은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 이웃이라면 항상 육신적인 이웃이 우리의 머리 속에 잠재되어 그 생각이 굳어졌기 때문에 달리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 속에서 세상 윤리와 도덕적인 차원에서 주위에 있는 가난한 자에게 선행을 베푸는 것으로만 이해해 왔을 뿐 성경 속에 숨어 있는 다른 어떤 이웃은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이다. 이웃 사랑은 인간관계에서 어려운 사람에게 물질로 돕는 구제나 봉사 활동 정도로 생각하고 그런 것을 실천할 때에 자부심을 갖고 신앙생활을 한 것이 사실이다. 이제 그 이웃의 근본 뜻을 성경 말씀 안에서 바로 알고 다른 차원에서 이웃을 찾아야 한다. 만약 그 이웃을 발견하였다면 몸과 마음뿐 아니라 목숨까지도 다 바쳐서 그분을 사랑하여 약속하신 영생을 얻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큰 계명이 되고 두 계명은 떨어질 수 없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한 번만이라도 되새겨 보았다면 어떤 답에 접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 속에 이웃을 사랑하는 문제와 영생이 서로 관계가 되어 있다는 것만 생각해 보았어도 세상적인 이웃이 아닌 것을 알고 다른 방향으로 한 번 찾아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이웃에 대하여 달리 생각해 보지를 못했다. 이 땅에서 하나님과 동등하게 사랑할 이웃이 누구이겠는가? 예수께서 당신을 두고 우리의 이웃이라고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인데 그것을 지금까지는 전혀 몰랐다.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동일하게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영생을 얻을 수가 있다고 했을 때에 즉시 알아차릴 수가 있어야 하는데 깨닫는 것이 거기까지 미치지 못하였다. 예수께서 하나님과 동등하게 사랑받을 이웃을 지칭(指稱)하실 때에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것을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항상 윤리와 도덕적인 이웃을 생각하다 보니 주님이 말씀하신 참이웃의 근본 뜻이 묻혀 버렸다.
요한복음 17장 3절에는 “영생은 곧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를 아는 것”이라고 하였다. “안다”는 단어인 “기노스코”는 체험하는 가운데 깨달아 알게 되는 것인데 이 땅위에 성육신하여 오신 그분과 그를 보내신 하나님을 알고 깊이 사랑하는 것이 영생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무지한 인생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참 이웃이라는 것을 직접 알려주셨으면 혼선이 없었을 뿐 아니라 이웃 되시는 주님을 하나님과 같이 사랑하였을 것이다. 성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성자 하나님께도 같은 사랑을 해야 된다고 한다면 누가 반대할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주께서 말씀하신 이웃과 우리가 생각했던 이웃은 너무나 거리가 멀었을 뿐 아니라 뜻밖에 예수 그리스도가 이웃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처음에는 쉽게 납득할 수가 없었다.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 사람으로 이 땅에 와서 자기를 낮추어 이웃으로 접근하였으니 문자 안에서 생각되는 세상 이웃을 생각하다가 차원이 다른 이웃인 그리스도를 쉽게 깨닫지 못하였다. 하나님 사랑은 강조하셨으나 자신은 나타내지 않고 이웃이라는 글자 속에 숨겨 놓고 사랑하라고 하셨으니 누가 눈치를 챌 수가 있겠는가? 지금까지는 아무도 감(感)을 잡지 못했다. 그러나 영생에 대한 질문 앞에 이웃 사랑을 하라고 하신 주님의 뜻을 조금만 신경을 쓰고 생각해 보았더라면 답을 쉽게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내용 중에 하나님과 분리해서 사랑할 수 없는 분이요, 영생을 가지고 계신 이웃이라고까지 말씀하였는데도 우리들은 모르고 있었다. 예수님 자신이 직접 이웃이 누구신지를 소개하셨지만 우리들은 다른 쪽으로 생각을 집중하다 보니 직감(直感)적으로 바로 깨달을 수가 없었고 찾아낼 수도 없었던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이웃을 세상적으로만 생각하고 다른 방향으로는 생각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육신의 지혜로는 찾을 수가 없었고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니 진리 안에서 영적으로 보면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보일 듯이 들릴 듯이, 가깝게 그리고 아주 가깝게 계셨으나 눈이 가리워지고 귀가 둔하여졌기 때문에 정확히 못 보고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을 뿐이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은 같은 분인데 다만 성자 하나님 자신은 죄인을 살려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육의 몸을 입고 오셨고 또 가장 가까운 이웃으로 표현해 주셨으니 오늘 우리에게는 얼마나 친근감이 있는 이름인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정확히 알고 나면 이 두 분에 대한 사랑은 나누어서 할 수가 없고 따로 떼어낼 수도 없는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강령(크레마타이, 묶어 놓다)이라고 한 뜻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을 나누지 말고 이 두 분을 사랑할 때에 어느 한 쪽을 더 사랑하거나 덜 사랑해도 안 되고, 똑같이 함께 사랑을 해야 영생 문제가 해결된다고 하신 뜻도 깨닫게 될 것이다. 범죄하므로 하나님과 원수된 자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피의 공로를 입혀 하나님의 친자녀로 삼으시고 아들의 기업을 함께 누리게 하신 그 은혜를 잊지 말고 하나님과 함께 사랑하라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랑은 가장 큰 계명이요 함께 묶여져 있다는 것도 이해할 수 있고 뗄 수가 없다는 이유도 알 수 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 참 이웃인 예수 그리스도 이 두 분을 위하여 죽음을 각오한 사랑을 반드시 해야 할 것이다. 나를 살려 주신 예수, 십자가에서 대신 죽어 주신 그 예수, 하나님의 친자녀로 삼게 하신 그분을 사랑하는 것은 모든 제물보다 낫다고 할 수밖에 없다.
5. 참 이웃을 감추어 놓으신 이유는 무엇인가
주님께서는 첫째 계명에 대한 사랑은 직접적으로 설명하면서 둘째 계명인 이웃에 대한 사랑은 예수 자신이기 때문에 숨겨 놓으신 것이다. 만약 시험하는 율법사 앞에서 하나님과 예수 자신을 똑같이 사랑해야 영생을 얻게 되고 이것이 큰 계명이라고 했다면 아마도 율법사는 돌을 들어 치려고 하였을 것이다. 지혜로우신 주님은 말씀 속에서 하나님만은 나타내시고 자신은 이웃 속에 감추어 놓았기 때문에 율법사와 서기관뿐 아니라 지금까지 참이웃을 찾지 못하였고, 깊이 숨겨진 것도 아닌데도 알지 못하였다.
인간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부부지간이나 부자(父子) 사이에도 내 몸처럼 사랑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不可能)한 일인데 주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을 다른 각도에서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지 모른다. 하나님과 이웃은 묶어 놓았다고 하였고, 하나님 사랑은 큰 계명이요 이웃 사랑은 둘째 계명이라고 한 것을 다른 각도로 생각해 보았더라면 알 수가 있었을 것이다. 또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이스라엘의 모든 제사보다도 낫다고 한 것이나,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면 영생할 수 있다고 한 것을 한 번 깊이 생각만 해 보았더라면 감추어진 이웃을 희미하게나마 짐작할 수가 있었을 텐데 전혀 느낌도 없었다.
혈연관계(血緣關係)에 있는 사람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할 수 없는데 주님께서 이웃 사랑을 하나님 사랑과 같이 하라고 하신 이유를 지금까지도 의심해 보지 않았다. 율법사에게 감추어 놓은 이웃이 오늘날까지 나타나지 않고 숨겨져 있으나 이제 밝히 말할 때가 왔다.
>> 계속 <<
우리들의 이웃이 누구인지 그비밀(예수그리스도)을 알게
하심 감사합니다.
때가차매에 있는 말씀이지만 폰에서 읽을수 있도록
올려주셔서 감사 해....용...
깊이 새기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다시한번 깊이 새기게 귀한말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당 ...
감사 합니다..
감사합니다.
다시금 세겨지는 글에 감사하옵나이다
감사합니다
우리의 참 이웃되신 예수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