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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예수 탄생(1)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7:14)"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1:21)"

 

 

마태복음 2:9-11

9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섰는지라

10저희가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11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예수 탄생에 대하여 성경을 읽을 때마다 많은 의문점이 생기고 여러 가지 모순(矛盾)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많았다. 성자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에 꼭 베들레헴으로 오셔야 되는가? 그리고 또 탄생 장소가 왜 하필이면 말구유에 나셔야만 하는가? 그뿐 아니라 그토록 가난한 가정을 택하여 출생하셨는가? 율법대로 하나님을 섬기고 양을 잡아 제사를 드리는 종교지도자들에게는 메시야 탄생을 감추시고 들에서 양을 치는 목자들과 이방나라 박사들에게 왜 메시야 탄생의 사실을 먼저 알리셨을까?

 

  해마다 12월이 되면 성탄카드나 성화(聖畵)에는 초라한 마구간에서 마리아가 어린예수를 품에 안고 있거나 아기가 구유에 누인 모습을 그린 것을 쉽게 볼 수가 있다. 또 그 곁에는 낙타를 타고 온 박사들이 예물 드리는 광경이 사진이나 그림으로 인쇄되어 널리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성경이 기록한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 탄생에 대한 지식이 너무나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러므로 이제 잘못 인식된 그 내용을 하나하나 성경에서 찾아보기로 하겠다.

 

1. 베들레헴에 인간으로 오신 예수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根本)은 상고(上古), 태초(太初)에니라(5:2)"

 

  마리아의 몸을 빌려 이 땅에 오신 예수는 B.C 700여 년 전에 미가의 예언대로 예루살렘 남쪽 5마일 떨어진 아주 작은 마을 베들레헴으로 오셨다. '베들레헴'은 '떡집'이란 뜻이며 '에브라다(열매가 풍성함)'는 베들레헴의 옛 이름이며 다윗의 고향이기도 하다. 이 지역은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들이 많으며 해마다 풍성한 열매를 수확한다고 한다. 조용한 농촌, 널리 알려지지도 않은 작은 마을에 이스라엘의 구속자이신 메시야가 탄생함으로 하늘의 산 떡이 내려온 것이다. 예수 자신이 생명의 떡이므로 그가 출생한 베들레헴은 이름 그대로 풍성한 떡집이 되었다. 유다 족속 중에 아무리 작고 보잘 것이 없는 마을이라도 영생하는 떡이 있을 때에 굶주린 백성들은 찾아오게 되며 그 떡을 먹는 자는 영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성자 하나님께서 죄인을 위하여 오시는 땅은 '베들레헴'이라는 곳이라고 선지자를 통하여 기록되었는데도 그 당시 제사장들이나 서기관들은 그렇게 가난한 모습으로 말구유에 나실 것은 알지 못하였다. 기록한 말씀대로 메시야가 오실 줄은 지식적으로는 알고 있으면서도 태어난 그 아기가 메시야인줄 알지 못했고 박사들을 통하여 메시야 탄생을 알려 주었는데도 반기지도 않았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무나 메시야를 영접할 수가 없고 자기 땅에 왔으나 그 앞에 설 수도 없게 된다. 하늘로써 내려온 생명의 떡을 그들이 받아먹지 못하고 영생의 만나가 되지 못하는 것은 선택함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635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하였고, 48절에는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고 하였으며 51절에도 "나는 하늘로써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예수는 생명의 참 떡으로써 '떡집'이라는 베들레헴을 택하시고 많은 사람들에게 생명의 떡으로 아낌없이 나누어 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이다.

 

2. 구유에 오신 예수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2:6-7)"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2:1)"고 하였을 때에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기 때문에 북쪽 갈릴리 지역에서 살다가 먼 남쪽 베들레헴까지 가야만 했다. 이용할 교통수단도 변변치 않은데 만삭된 아내와 함께 144Km(300)나 되는 길을 떠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 될 뿐 아니라 사람의 생각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실제로 호적신고만 하고 돌아오는 일이라면 구태여 아내까지 데리고 가지 않고 요셉 혼자 가서 다 처리하고 올 수 있는 일인데 마리아는 만삭된 몸으로 남편을 따라 먼 길을 가게 되었다. 무리하게 서둘거나 재촉하다가 도중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구급차도 없는 시대이기에 아주 난감(難堪)한 문제가 생길텐데 두 사람이 먼 길을 같이 떠나게 되는 배후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 출생하셨을 때 사탄의 역사가 일어나면 쉽게 살던 갈릴리로 돌아오지 못할 상황이 생기게 되므로 하나님은 애굽 피난길까지 미리 계획하시고 마리아에게 요셉을 따라 힘든 걸음을 택하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예정 속에 나타나는 일이지만 마리아가 요셉을 만나는 때부터 끝없이 밀려오는 시련과 계속되는 고난의 산은 그들의 앞을 비켜주지 않았다. 요셉과 마리아는 호적하라는 국가의 시책을 따르기 위하여 출발하였지만 고향 길은 멀기만 하였고 간신히 베들레헴까지 왔을 때에는 사관(舍館)에 용납할 곳이 없을 때였다. 만삭된 몸으로 떠난 길이기에 시간이 얼마나 걸렸는지는 몰라도 아주 늦게 도착한 것만은 틀림이 없는 것 같다. 본문에 '사관'은 '여인숙(旅人宿), 또는 사람이 머물만한 집'을 말하는데 이미 머물 만한 장소는 먼저 온 사람들이 다 차지하고 있었다. 해는 져서 어두워지고 몸을 가누기조차도 어려운 처지에 산고(産苦)의 시작은 마치 죽음을 방불케 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이때 급히 택한 장소가 구유가 아니었던가? 어느 누구의 도움도 없이 산기가 돌고 진통이 있으므로 급하게 찾은 곳이 마구간이었다면 준비된 산파의 도움은 물론 산후조리나 출산준비와 그 후속조치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생각해 볼 시간도 없었을 것이다. 아무리 삭막(索莫)한 세상의 인심이라도 젊은 여인이 마구간에서 출산을 한다면 그대로 방치하지 않고 문칸 방 하나쯤은 빌려주었을 텐데 이 땅에 오신 예수만은 인간들의 도움이나 동정도 받지 못했고 환경까지도 그를 외면했다.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으로 예수를 처녀의 몸에 잉태케 하셨으면 성취되는 과정 또한 그 능력을 행할 수 있으나 부닥치는 환경을 헤쳐 나가도록 내버려 두시고 시련의 산을 넘게 하였다.

 

  성자 하나님께서 도성인신(道成人身)하시고 죄인을 찾아오시는 과정이 이렇게도 험하고 가혹한 시련으로 참담(慘憺)한 모습인 것을 어느 누가 한번 생각해 보았던가? 생사화복(生死禍福)을 친히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시라면 그래도 출산할 장소만은 준비되어 있어야 하지 않은가? 사람의 자식도 마구간에서 태어난 역사가 없는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출생만은 지번(地番)도 없는 곳, 동물들이 기거하는 장소가 산실(産室)이 되었고 짐승의 밥그릇이 아기의 침실이 되었다면 누가 이 사실을 믿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이 꼭 이래야만 하시는가? 이 길밖에 다른 방법이 없는가?

 

  악취가 나는 음산(陰散)한 곳에서 마른 장소라고는 말이 밥을 먹고 난 빈 그릇 뿐이어서 그 속에서 아기 예수를 강보로 싸서 뉘어 놓을 수밖에 없었던 처지라면 마리아는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하신 말씀을 의심하지 않았겠는가?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찌어다(1:28)"라고 하는 천사의 음성을 들었으나 나타나는 현실은 너무나 어렵고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32절)'이라고 하였으나 현재 처해져 있는 환경을 보면 그 말을 어떻게 믿을 수가 있었겠는가? '이 아이는 다윗의 왕위를 이을 자이며 야곱집에 왕노릇 할 자(33)'라고 하면서 '예수'라고 이름을 지어주신 것까지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였던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아무 걱정 없이 평범하게 살아가는 마리아를 찾으시고 어떤 의논이나 상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명령을 내리셨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면 책임지고 형통한 길을 열어 주셔야 하는데 기가막힌 사연 속에 방치하시고 못 본체 할 때에는 야속한 것 같았을 것이다. 그러나 훗날에 하나님의 섭리를 친히 느끼게 될 때에는 그 괴로웠던 일들 때문에 남다른 감화가 있게 되었을 것이다.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 지상의 군주(君主)들이나 주권자들의 통치와 그 휘두르는 권세는 자신의 힘으로 능력을 과시하는 것 같지만 그 배후에는 천지창조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이 조정하고 계신다.

 

  마리아와 요셉은 환경의 도움이나 세상 물질의 윤택함도 없었고 이 땅의 어떤 권력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이 험산준령(險山峻嶺)을 스스로 넘어야 했다.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가이사 아구스도가 각 나라에 호적하라는 명령과 예수출생이 맞물리게 한 것은 민족들이 대 이동을 하는 복잡한 때를 맞추어 예수를 숨기기 위한 하나님의 모략이었다. 여관이나 또는 여인숙에 머물렀다면 본인의 이름과 주소와 숙박의 원인을 밝혀서 자신의 흔적을 남겨놓게 된다. 만약 요셉이 이런 수순(隨順)을 밟았다면 이것은 훗날 예수를 찾는 원수들에게 빌미를 주게 되고 수사에 단서를 제공하기 때문에 그런 환경을 택하게 하신 것이다. 여러 지방에서 모여온 군중과 많은 무리들 속에 하나님의 아들을 태어나게 하시므로 그 때 사람들은 별로 신경 쓰지 않게 되었고 아기 예수는 대중들 속에 숨겨 두었다가 그 장소를 떠나버리면 아무 흔적도 남지 않게 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아무리 복잡한 환경이 부닥친다고 해도 그 배후에는 철저하게 하나님이 간섭해주시고 도와주시는 은혜가 있음을 몸소 체험케 하심을 알 수가 있다.

 

3. 짐승의 밥으로 오신 예수

 

  말씀이 육신이 되어(1:14) 이 땅에 탄생하신 예수님은 아름다운 곳에 임하시지 못하고 추한 짐승의 밥그릇에 누우셨다. 그것은 예수 자신이 짐승들의 밥이 되어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가증스럽고 추한 짐승 같은 이방이 예수 그리스도를 먹으므로 하나님의 사람이 된다는 것인데 이것은 놀랍고도 신비한 사건중의 하나가 된다.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제자들을 부르시며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6:53)"고 하였고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6:54-55)"라고 하였다. 2천년 전에 구유에 오신 예수를 짐승 같은 이방인 우리가 먹고 하나님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천지창조보다 더 크고 위대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 구유에 죄인의 밥으로 오신 예수를 어떻게 먹는다는 말인가?

  예수를 먹는 자만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시 살게 되고 또 영생의 몸이 된다는 것은 말씀자체가 되신 하나님(요1:1)께서 육의 몸을 입고 오셨기 때문에 진리의 말씀을 소유하는 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를 먹는 것이다.

 

  사도행전 109절 이하에 보면 베드로가 제 6 기도하러 지붕에 올라갔을 때에 비몽사몽(非夢似夢)간에 하늘이 열리며 큰 그릇이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내려오는데 그 안에는 각색(各色)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것들을 잡아먹으라고 하였으나 베드로는 내가 이날까지 가증한 것을 입에 넣지 않았는데 '왜 내가 이것들을 잡아먹어야 합니까?'라고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깨끗하게 하였으니 먹으라고 했으나 속()되고 깨끗지 못한 동물을 내가 먹을 수 없다고 베드로가 말하였다. 이 소리가 세 번 있은 후에 그 그릇이 하늘로 올라가버렸다.

 

  네 귀에 매달아서 내려온 그릇은 이 땅의 사방, 즉 동서남북을 가리키는 뜻이며 그 그릇(큰 보자기) 안에 있는 가증한 짐승들은 이 땅에 흩어져 있는 모든 이방 사람을 가리키는 비유이다. 하나님께서 이방백성을 가증한 동물로 보고 베드로에게 그 동물을 잡아먹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실제로 사람을 먹는 식인종이 되라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복음으로 이방을 정복해야 한다는 사명을 베드로에게 맡긴 것이다. 이 사건이 일어난 다음에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바로 베드로를 찾아 왔을 때에 성령께서 일어나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10:19-20)는 지시를 받고 그들과 함께 욥바로 내려가서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파하였다(10:23-35).

 

  여기에 나타난 비유에서 보듯이 가증한 동물 같은 이방사람은 구유에 담긴 예수를 먹어야 인간다운 사람이 된다. 이러한 상징적 뜻으로 생각해 본다면 아기 예수가 누운 구유는 어떠한 동물의 밥그릇인지는 몰라도 주님 오신 목적이 이방구원이기 때문에 냄새 나고 추한 낙타나 사나운 말밥그릇을 연상케 해 볼 수가 있다. 특히 말구유는 성질이 못되고 부정한 동물의 밥그릇이다. 예수를 믿기 전에는 가증한 동물이었던 내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먹었음으로 하나님의 귀한 성도가 된 것이다. 2000년 전에 오신 예수는 이방 모든 백성들이 지금까지 먹었지만 모자람이 없고 항상 풍성한 하늘의 산 떡인 것이다.

 

4. 아기 예수를 환영한 사람들

 

  마태복음 21절에서 15절에 보면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아기 예수는 박사들을 만난 뒤에 바로 애굽으로 떠나갔다고 기록되어 있고 누가복음 28절부터 20절까지는 목자들이 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를 방문한 것이 기록되어 있다. 21절에서 24절에는 아기 예수가 할례 받은 내용이 나오는데 그렇다면 난지 8일 만에 행하는 할례를 어디에서 받았는가? 40일이 될 때에 율법의 규례를 따라 결례의 날에 예루살렘성전에 와서 어린 아기를 주(하나님)께 드리고 비둘기 두 마리로 제사를 드린 것은 애굽에 피난가기 전인가, 피난 간 후인가? 성경에서 정확히 그 내용을 찾아야 한다.

 

  지금까지 예수가 구유에 출생하자마자 애굽으로 피난을 간 것으로 알고 전하였다면 잘못 증거를 한 것이다. 누가복음 2장을 먼저 보고 마태복음 2장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메시야 탄생을 위하여 환경을 먼저 조성하시고 적절한 시기와 때를 맞추어 출생케 하시고 율법에 정해놓은 율례(律例)대로 8일 만에 할례를 행하였고 40일 만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제사장 앞에 제사 드리는 순서까지 진행한 다음에 애굽으로 피난가게 된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아기 예수를 먼 이국(異國)땅에 피난을 보낼 때에 그냥 보내지 않고 그 땅에 들어가서 생활할 수 있는 필요한 물질까지 준비시켜놓고(2:11) 이동하게 하시는 것을 볼 때 모든 것을 하나님이 그 배후에서 직접 간섭하고 계시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메시야가 이 땅에 오셨을 때에 맨 먼저 만난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 박사들인가, 목자들인가? 또한 박사들이라면 이들이 예물을 드린 곳이 마구간인가, 가정집인가? 그리고 또 목자들이 달려온 장소는 어디인가? 헤롯은 왜 두 살부터 그 아래의 어린 남자아이를 모조리 죽이라고 했는가? 이 모든 내용들을 하나하나 성경에서 찾아내고 정확하게 증거해야 한다.

 

  먼저 다음 내용을 읽어 보고 자신의 성경지식을 솔직히 한번 점검해 보면 은혜가 될 것이다. 본 시험지는 2002 11월에 동인교회에서 주일오후 2 성경공부시간에 즉흥적(卽興的)으로 치른 문제인데 전교인 중에 한 사람만 만점을 받았다.

 

1) 목자들(poimevne"포이메네스)이 만난 아기(brevfo"브렙호스)예수 (2:8-20)

 

  아기 예수가 탄생한 것을 알고 맨 먼저 만난 자는 베들레헴 목자들이다.

  하나님의 역사는 거룩한 제사장들이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는 예수의 탄생을 감추시고 베들레헴 동쪽 초원에서 밤하늘의 무수한 별들과 함께 밤잠을 설쳐가며 양떼들을 지키는 목자들에게 뜻밖에 큰 기쁜 소식을 알려주었다.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목자들에게 비취매 크게 무서워할 때 '다윗의 동네에 구주가 나셨다'는 놀라운 소식을 그들이 듣게 되었다. 세상 죄를 지고 가실 또 한 마리의 특수(特殊)한 양이 하늘로부터 이 땅에 탄생되었다는 것은 양을 치는 목자들에게는 너무나 뜻밖이요 크게 놀랄 일이었다.

 

  별들이 총총히 비치는 베들레헴의 밤하늘 아래는 많은 목자들이 흩어져 양을 치고 있었다. 그런데 양떼들 틈에서 밤잠을 자지 않고 깨어있는 목자들을 선택하여 유월절에 제사드릴 어린양 되신 예수탄생을 알려 주신 것이다. 이 목자들은 영리(榮利)를 목적하고 양을 치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 때에 쓰일 양들을 위탁받은 목자들이기 때문에 그 책임은 더욱 막중하였다. 제사와 관계를 맺고 양을 치는 목자들에게 이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은 물질이나 명예의 영광도 아니었고 어떤 출세의 승진(昇進)이나 계급의 소식도 아니었다. 다윗의 동네 어느 마구간에 가보면 강보에 싸여서 구유에 누인 아기(brevfo"브렙호스)예수를 만날 것이라는 소식이었다. 그 어린 아기는 장차 '너희의 구주시며 그리스도 주'라고 하였고 그는 또 '나라의 임금이 될 표적이라'고 하였다(2:11).

 

  이 소식을 듣고 목자들은 즉시 그 밤에 베들레헴을 향하였다. 이리가 양떼를 습격할 염려가 있기에 이 양들은 어떻게 하고 가야 할 것인가라고 하는 걱정이 될 수도 있으나 모든 것을 뒤로하고 메시야 탄생을 기뻐하며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달려갔던 것이다.

메시야를 만난 자들이나 환영을 한 자들의 배경을 보면 위대한 지도자들은 제외되고 이 세상에서 낮은 위치에 있는 자들이 먼저 환영하였고 만나게 된다. 목자들이 달려가서 천사의 말대로 강보에 싸인 갓난 아기예수와 그의 모친 마리아와 요셉을 본 이들이 첫 방문자가 되었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베들레헴 말구유에 제일 먼저 찾아온 사람들은 동방박사들 이라고 말하여 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목자들이 먼저 찾아왔다고 하는 자들도 있다. 또 목자와 박사들이 방문한 시차(時差)는 있으나 거의 동시적(同時的)인 사건으로 보는 자들도 있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목자들이 제일먼저 찾아가서 만나게 된 것이다. 

 

  목자들이 달려가서 구유에 누인 예수를 보았을 때에는 갓 태어난 아기인 브렙호스(brevfo")라는 단어를 썼다. 핏덩어리 어린 아기라는 뜻이다. 40일 만에 아기예수를 안고 부모들이 성전에 들어갔을 때에 만난 시므온이나 안나 역시 갓난아기인 브렙호스를 안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마태복음에서 동방박사들이 베들레헴에 찾아왔을 때에는 이 아이가 제법 많이 자란 파이디온(paidivon)이란 단어를 썼다. 헤롯왕도 2살 아래의 아기를 죽일 때에 사용한 단어 또한 파이디온을 사용했다. 그러므로 누가복음 2장에서 목자들이 예수 탄생 즉시에 만난 어린아이와 마태복음 2장의 박사들이 만난 아기는 그 시기가 다르다. 아기 예수가 많이 자라난 뒤에 동방박사들이 찾아왔기 때문에 기록된 두 단어가 다른 것이다. 어린 핏덩어리의 아이와 많이 자라서 걸어 다니는 아이는 단어를 살펴보아도 너무나 차이가 많이 나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린 아기 예수도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행하였고 이때부터 이름을 예수라 불렀다(2:21). 할례의 역사는 아브라함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창세기 179절에서 14절을 보면 남자가 난지 8일 만에 양피를 베는 예식을 행하는 것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 사이에서 지킬 하나님의 언약이요 표징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증표로 남자는 반드시 양피(陽皮)를 베는 할례(割禮)를 행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출애굽 하는 백성에게도 남자를 낳으면 8일 만에 할례를 행하게 하셨다. 그 다음 32일이 지나서 40일이 되면 번제의 양은 1년 된 것을 취하고 속죄제를 위하여 집비둘기 새끼나 산비둘기를 취하여 제사장에게 가져갔다. 만약 너무나 가난하여 양을 드릴 수가 없으면 산비둘기나 집비둘기 새끼 둘을 취하여 한 마리는 번제로 또 다른 한 마리는 속죄제를 드리라고 하였다(12:1-8).

 

  베들레헴은 호적하는 분주함도 이제 지나갔고 동네사람만 전과 같이 조용히 남아있는 시골마을에 고향 찾아온 요셉만은 떠나지 않고 있었다. 마굿간에서 아기를 낳아 구유에 뉘어 놓은 딱한 사정을 바라본 동네사람들은 요셉에게 방 한 칸은 제공했을 것이다. 이 집에 들어가서 8일째 되던 날에 할례를 행하였고 또 40일이 될 때에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를 하나님께 드리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던 것이다. 가정형편이 너무나 가난하여 드릴 양이 없기 때문에 비둘기 한 쌍이나 또는 어린 반구 둘로 제사를 드리려고 한 것만 보아도 그 생활을 짐작해 볼 수가 있다.

 

2) 시므온(Sumew;n 쉬메온)이 만난 예수 (2:25-35)

 

  '시므온'이란 뜻은 '여호와께서 들으셨다'는 뜻이다. 시므온은 목자들이 구유에 누인 예수를 만나고 간 다음 40일이 되던 날에 성전에 들어오는 아기 예수를 두 번째로 만난 자이다.

  시므온이라는 이름은 유대사회에서 흔한 이름이다. 시므온에 대하여 고대학자들은 가말리엘의 아버지라고 하며 산헤드린의 회당장이라고 하는 설이 있을 뿐 여러 가지 추측들이 많으나 확실한 증거는 없다. 어쨌든 시므온은 예루살렘에서 한평생 의롭고 경건하게 살면서 이스라엘의 회복과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고 하였다. 이스라엘의 위로는 메시야가 옴으로 참 위로가 될 것이다. 시므온은 하나님의 집을 떠나지 않고 항상 하나님만 바라보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고통당하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큰 위로가 될 메시야를 기다렸으매 성령께서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는 지시를 받은 자이다.

 

  시므온은 열심 있는 유대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항상 성전을 중심하여 살아간 사람이다. 주의 성령의 역사가 그 머리 위에 임하였고 그는 성령의 교통 속에서 눈이 열려 성전에 들어오는 메시아를 알아보았다. 어느 날 성전에 들어갔을 때에 넉넉해 보이지 않는 젊은 부부가 율법의 결례를 행하고자 아기를 안고 성전에 들어오는 것을 보는 순간에 저 아이가 바로 내가 기다리던 메시야로구나 하는 것을 성령의 감동으로 알게 된 것이다. 율법의 정한 례()를 지키기 위하여 비슷비슷한 아이를 안고 들어오는 부모들이 한둘이 아니었으나 시므온만은 아기 예수를 즉시 알아보고 그를 영접한 것은 성령의 역사였다. 그는 주님을 보았고 또 만나는 순간 평생 소원하였던 뜻이 이루어질 때에 아기를 안고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향하여 찬양하면서 '말씀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라면서 죽어도 여한이 없음을 고백 하였다. 그는 또 이 아기를 안고 이스라엘의 구원자요 이방을 비취는 빛이요 이스라엘의 영광이라고 찬송하였다(2:29-32).

 

  시므온은 아기 예수에 대하여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은 자(2:34)"라고 예언 하였고 여인 중에 가장 복 있는 자의 어미였지만 슬픔의 고통은 칼이 마음을 찌르는 듯 하게 된다는 말을 하였다. 시므온은 백성들의 구원자로 오신 예수에 대해 많은 박해와 고난 속에서 십자가의 죽음을 암시하는 예언을 한 것이다. 어린양으로 이 땅에 오신 주님이 죄인을 위하여 겪게 될 고통과 십자가의 죽으심은 우연한 것이 아니요 창세 전에 예정된 것임을 말하였으나 그 뜻을 아는 자가 없었다(53:4-9, 16:21, 17:21-23, 20:18-19, 26:2). 그 당시에 성전에는 제사장과 많은 선지자와 율법사들이 있었으나 아무도 메시야로 오신 아기 예수가 성전에 들어오는 것을 알아보지 못했다. 이 시대의 성도들도 오실 주님을 항상 기다리며 그 나라를 사모하고 충성할 때에 반드시 주님을 맞이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시므온을 들어 훗날에 있을 예표로 보여 주신 것이다.

 

  타락과 불신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이 시대에 시므온과 같이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사모하는 자들은 주님 만날 때까지 신앙의 기본자세를 올바르게 정립하여 성전을 중심으로 기도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 외경에 보면 시므온의 나이가 그 당시에 113세라고 한 것을 보면 재림의 주님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자도 시므온처럼 고령이 된다 하여도 그 뜻을 이룰 때까지 죽지 않고 오래 산다는 보장을 해 주실 것을 믿어야 한다. 다시 오시는 주님을 살아서 맞이하기 위하여 늘 깨어 기다리는 자에게는 시므온처럼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그 나이는 다만 숫자일 뿐인 것을 증거 해 주신 것이다.

 

3) 안나(Anna 안나)가 만난 예수 (눅2:26-38)

 

  안나는 시므온 다음에 세 번째로 아기 예수를 만난 여 선지자이다.

  '안나'는 히브리음으로 '한나'이며 '은혜'라는 뜻이다. 사무엘 선지자의 어머니의 이름과도 같다. 성경을 보면 시므온의 신분은 확인할 수가 없지만 안나는 아셀지파 바누엘의 딸이라는 것까지 소상히 밝혀 놓았다. 아셀지파는 야곱의 8째 아들이며 바누엘은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하여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고 그곳에 히브리식 이름으로 브니엘이라고 한 그 지명에서 나온 이름이며 뜻은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말이다(32:30).

 

  안나는 결혼하여 7년 동안 남편과 함께 살았으나 과부가 된지 84년이라고 하였다. 고대에는 보통 17-18세에 결혼을 했다고 본다면(18+7+84=109) 그녀는 109세쯤 된 셈이다(20세 결혼을 했다면 111) 안나는 나이가 많으나 눈이 열린 선지자였다. 그는 항상 교회 생활 속에서 인간들과는 큰 교제는 없었으나 하나님과 교통하면서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과 기도 속에서 봉사하였으며 나이에 비하여 늙고 꼬부라진 연약한 자는 아닌 것 같다. 그는 이 땅의 즐거움이나 행복을 누려보지 못하였으나 항상 신본주의로 살았으며 하나님의 나라와 메시야를 기다리며 사는 자이기 때문에 하늘의 소망이 넘치는 자였다. 그가 결국에는 시므온 같이 소원을 이루었다. 메시야인 아기예수를 즉시 알아본 것을 보면 눈도 흐리지 않은 것 같다. 그가 아기 예수를 만난 기쁨 속에서 하나님께 감사하였으며 예수에 대하여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이 땅에 살면서 다시 오실 메시야를 사모하며 주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는 시므온이나 안나와 같이 남녀노소(男女老少)구별이 있을 수 없으며 그 나라를 쟁취하는 역사에는 성별의 차이가 나타날 수가 없고 민족의 구별도 관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안나의 신앙생활 하는 모습 또한 마지막 때의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자에게 본이 되며 거울이 된다. 메시야를 만날 때까지 죽지 않는다는 증표(證標)를 가진자라면 역시 안나와 같이 세상 나이는 숫자일 뿐 육체의 노쇠(老衰)와 관계가 없다. 일백 이십 세인 모세와 같이 눈이 흐리지 않고 몸의 기력이 쇠하지 않게 되는 사명연령이 그의 나이가 될 것이다. 주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까지 살아서 주님을 맞이할 자는 시므온과 안나와 같이 성령의 감동 속에서 끝까지 성전을 중심하여 살면서 하나님을 섬기고 진실하게 봉사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초림의 주님을 만난 자들을 보면 유명인사가 아니었으며 환경이나 여건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으나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맺고 살았던 자들이었다. 형식적이며 위선적인 자들의 눈과 귀는 막으시고 하나님께 의합된 자를 찾아 말씀의 눈과 귀를 여시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해 주시는 것을 오늘 이 시대 성도들은 잊어버리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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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님의  예정가운데  이루어지는 말씀  넘  감사 드립니다...

    우리 모두  마지막 역사의 주인공이 되길  기도 드립니다..

  • profile

    초림의 아기예수를 만난 시므온과 안나와 같이

    저희들 재림의 주님을 만나는 역사가 일어 나게 하옵소서 .

    올려주심에 감사하며 은혜롭게 읽어보고 갑니다.

  • 아~멘!!

  • 올려주신글  감사히  잘읽고갑니다

  •    귀한 말씀 감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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